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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자연처럼 2008. 4. 7. 16:02




중국인들이 이른바 '천하제일관'으로 부르는 산해관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이 갈수록 그 도를 더해 가고 있습니다.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우리의 조상 고구려와 발해. 그 고구려와 발해의 근거지는 바로 현재의 중국 22개 성 중에서 동북지역 3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지역 입니다.

중국이 보기에도 한반도가 대한민국 중심으로 통일이 될 확률이 높아 보이는지, 요즘 이 동북삼성의 역사적 정통성에 대한 관리가 아주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통일 후 중국과 전쟁을 하는 내용인 가상 전쟁소설 '고구려의 꿈'을 연재하고 있는 저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그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는 현상황이 더욱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는 바로 이 것입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 동쪽과 북쪽 경계를 긋고 있는 만리장성.



▼베이징의 만리장성 관광 지도. 동쪽과 북쪽은 만리장성이 가로지르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베이징은 만리장성이 처음 세워졌던 진나라 시대, 한나라 시대만 해도 완전히 변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와 발해가 있던 시기의 중국 왕조들인 한나라, 위진남북조, 수나라, 당나라 등의 수도는 북경에서 수천, 수백km 떨어진 장안과 낙양이었습니다. 낙양에 있는 룽먼(龍門)석굴.



▼장안(서안)에 있는 옛 성도인 장안성.



▼위에 있는 북경지도의 13번 지점인 거용관. 북경의 북쪽을 지키는 만리장성의 관문 중 하나입니다.



▼거용관과 팔달령장성 사이에 있는 수관(水關)장성.



▼이 팔달령장성을 넘으면 북경이 끝나고 하북성이 시작됩니다. 하북성도 한, 수, 당 시대에는 중국이 아니었다는 증거지요. 위 지도상의 14번 지점.



▼북경에서 동쪽으로 약 300km 가면 산해관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그 산해관은 바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큰 관문이지요.
산해관은 따로 '천하제일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즉,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쪽에 대한 방비를 아주 크게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산해관의 동문.



▼산해관에서 왼쪽으로 보니 큰 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산을 타고 오르고 있습니다. 성 안쪽은 중국인들이 지켜야 할 자기 나라가 분명 하겠는데, 성 밖은 도대체 어디 일까요?



▼일만육천리 만리장성 중 천하제일관이라는 산해관 오른쪽으로 약 2km 가면 바다가 나옵니다. 그 바다에 있는 산해관의 한 포인트가 있는데, 그 곳을 '노룡두'라고 합니다.



▼진시황때 축조를 시작하여 1,700여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명나라 시대에 완성한 만리장성. 즉, 명나라 까지도 이 만리장성 밖은 중국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산해관 뿐 아니라, 이 노룡두의 건축은 명나라 시대에 완성 된 것입니다. 노룡두의 누각.



▼만리장성의 진정한 끝인 노룡두의 모형. 저렇게 바다까지 성곽을 내밀어서 적이 건너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저 건너편의 방어해야 할 대상은 결코 중국인이 아닌 것입니다.



▼BC 214년 진나라 시대부터 16세기 중반 명나라 시대까지 수 천년 간 "이 선 밖은 우리땅 아니야!"라며 줄을 긋고 또 그은 만리장성. 이제 와서 자기네 조상이었다고 하기에는 선을 너무 화끈하게 그어 놓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선을 박박 그으며 두려워 했던 고구려와 발해가 이제 와서 자기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달에서도 보인다는 이 만리장성이 웃을 일 입니다. 이제 우리 정부에서도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처해야 하겠습니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 노룡두. 적의 우회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 바다로 들어가 성을 쌓기 시작한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도깨비뉴스 국방전문 리포터 신인균




만리장성에 대한 3가지 오해





첫 번째 오해는 이 모든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모두 진시황이 축조했을 것이라는 점 이다.

물론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축조하긴 했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만리장성을 처음 만든 사람은 진시황제가 아니다.

굳이 만리장성의 기원을 따진다면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나라가 아닌 그 전의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만리장성이라는 말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이다.

결국 엄밀히 말하면 진시황은 전국시대 연(燕)·조(趙)·진(秦) 등의 여러 나라가 외적(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이미 구축했던 장성들을 통일 이후 연결하고 더 연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두 번째 오해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의 존재가 진시황 때 축조한 장성의 모습 그대로 일 것이라는 점 이다.

유감스럽게도 진나라 때 축조된 고대 장성은 세월이 흐르고 여러 왕조의 명멸을 거치는 동안 이루어진 수많은 개 ·보수 및 방치 등을 거쳐 거의 본모습을 볼 수 없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은 거의 명나라 시대에 축조된 것 이다.

명의 영락제 시대 이후부터 진행된 만리장성의 개축은 무려 18차례의 개수를 거쳐 16세기 말 동쪽의 하북성 산해관(압록강 인접)으로부터 서쪽의 감숙성 가욕관까지 연결된 실제거리 1만2000여리나 되는 오늘날의 만리장성이 완성되었다.




특히 만리장성은 강력한 국가의 상징일 것이라는 일반인의 세 번째 오해 와는 달리 실제 역사상 비교적 세력이 약한 한족 왕조 때 더 활발하게 축조 되었다.

만리장성의 축조 목적이 북방의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이므로 실제 한족국가이면서도 문물이 융성했던 당대나 몽고족이 통치한 원대, 만주족이 통치한 청대에는 만리장성에 대한 개보수나 증축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보며 문득 악순환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정정이 불안하고 늘 북방 이민족이라는 위협요소를 가지고 있는 국가가 이 위협요소를 막기 위해 인력과 자금을 투자하여 만리장성이라는 대역사를 하다보니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오히려 정정이 불안해지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이처럼 만리장성의 보수는 역대 왕조의 커다란 두통거리였다.

안하자니 북방 이민족 침입이 걱정되고 하자니 비바람에 허물어진 장성을 보수하기 위해 매번 수십만이 동원되어야 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만리장성을 쌓던 수많은 사람이 일을 하다 사고로 죽게 되면 그 자리에 묻혔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악명이 높았던 천덕꾸러기 만리장성도 오늘에 와서는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이라는 감투도 쓰고 비싼 입장료를 받고 짭짤하게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는 효자 상품으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되었으니 인생역전이라는 말이 절로 실감날 정도이다.

황토를 틀에 넣어 햇빛에 건조시켜 만들었다는 수많은 흙벽돌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만지며 걸으니 손끝을 따라 벽돌 하나에 숨어있는 이름모를 사람들의 땀과 한숨이 전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제는 중국의 상징이 되어버린 만리장성과 진시황의 악연,

진시황의 입장으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으로 기존의 장성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축조했을 뿐인데 두고두고 백성들의 피와 땀을 강탈해간 폭군으로 회자되는 점은 안된 일이나 그의 악명으로 후세가 두고두고 먹고 살게 되었으니 그 또한 후배들에게 전해준 위대한 유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다음 여행지로 향하기 위해 팔달령을 내려가려니 천만다행으로 맑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