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져 온 글입니다.
'살아서 장례식, 서길수 교수' <2019.12.28, 조선일보 주말섹션 B1>
서길수(75) 전 서경대 교수는 고구려 발해학회 회장을 지내며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싸운 학자였다.
2009년 정년퇴직하곤 "삶과 죽음에 대해 공부하겠다"라며 머리 깎고 3년을 강원도 산사에서 보냈다. 그는
"책을 펴낼 때마다 장례식 겸 출판기념회를 하기로 했다"라며 "앞으로 내 장례식을 몇 번 더 치를지 나도
궁금하다"라고 했다 (記者 질문) 뭔가 깨달음을 얻고 하산했나요?
"삼 년 만에 깨달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은 깨달은 사람으로 가득 찰 겁니다.
내 그릇으로는 이승에서 득도할 수 없다는 것은 깨달았지요" (웃음, 下略)
책을 낼 때마다 장례식을 치른다 거나 관법수행을 한다(나를 내가 쳐다보는 수행인데, '탄트라
명상법'에 나옴) 사람은 암(癌)보다는 걱정,고통,놀램 때문에 죽어간다 등은 단수(段數)있는 얘기다,
내 경험에서 보면 '깨달음'이란 것은
(a) 처음 인연-누구를 만나느냐, 그것도 고비가 있고,
(b) 십 년 안팎의 시간으로는 어림없고,
(c) 본인의 근기(根機)로 면면히 정진해 나가는 것인데,
좋은 인연이 계속 따라줘야만 한다, 아슬아슬함의 연속이다,
1. '삼 년 만에 깨달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이 깨달은 사람들로 가득 찰 것'... 과연 그럴까?
현실은 그 반대다, 사람들은 관심이 없고, 깨닫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깨달음이란 말이 너무 거창해서, 절대불가(구름 위)의 영역으로만 여겨진다,
■ 깨달음의 반드시 필요조건:
a. 인연자(因緣者)를 만나야 한다 - 혼자서는 깨달을 수 없다
b. 현실의 삶(특히 財産)을 포기해야 한다,
c. 배우자, 자식을 버려야 한다 - 행복한 삶은 깨달음을 구(求)하지 않는다,
그것 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수행은 막힘과 갈등이 따른다, 그러므로
d. 양파껍질을 벗겨내듯 내가 뒤집어 쓴 껍질(固定觀念)을 한 꺼풀씩 벗겨내야 한다,
자기 긍정에 바탕을 둔, 자기부정의 연속인 것이다.
그런 근기(根機)가 몇이나 있으리오?
깨달음을 얻는 일은 그만큼 희귀하다,
2. 인터넷 검색을 해 보시라.
도대체 종교, 정신계의 고수들 중에서 깨달았다는 사람은 어디 있는가?
간혹, 깨달았다는 사람이 쓴 책을 보는데, 뭔가 신비한 경험을 말하면서
사람을 현혹시키고, 자기한테 많은 절을 하라고 강요하질 않나, 자존망대에 빠져 있더라,
스타강사(법륜)도 '반야심경' 강의에서 헛소리(不增不減을 해설하면서)를 해 대고,
'큰스님'이라 해도 쉽고 정확하니 사례를 들면서 연기(緣起)를 설명해 내질 못하더라,
3. 석가모니, 예수는 각자(覺者), 성인(聖人)이신데,
과연 그분들은 근심,걱정,고통이 없는 삶을 살다 갔을까?
아닐 것이다. 근심, 걱정, 화냄, 어리석음도 정상이다, 건강한 것이다.
단지, 그것이 지나쳐서 삶을 짓누르고, 삶을 망가뜨릴 정도가 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4. 지금 세상에 정각(正覺)한 者, 깨달은 사람은 안 보입니다.
깨달았다면 세상에 나왔어야 한다, 깨달았는데 두문불출하고 있다면 덜 깨달은 것이다.
불교계에서는 돈오돈수, 돈오점수를 놓고서 논란이 있었습니다.
'깨달았다면 그걸로 끝'이란 입장이 돈오돈수, '깨달았어도 계속 닦아 나가야 한다'(增得)는
입장이 돈오점수 다. 이것은, 깨닫지 못한 스님들끼리의 부질없는 논란입니다.
장님들이 코끼리 코를 만지고는 코끼리가 이렇다 저렇다 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다,
'길을 냈다, 가닥을 잡았다, 터득했다'라는 말로 깨달음을 접근한다면 논쟁할 필요가 없다,
내가 산다는 것,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일체의 것(색수상행식; 오온五蘊),
그 진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내 두뇌에서의 '대상에 대한 해석'(五蘊皆空)'이며, 이것이 '정신적 오염'이다.
육체적 오염은, 목욕을 했어도 몸에선 때가 생기고,
머리털과 수염은 깎았어도 이내 다시 생기며, 밥은 뱃속에서 똥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삶은 그 자체가 오염인 것인데, 마음도 몸처럼 내가 늘 깨끗이 간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리 도를 닦았더라도 세상살이에 들어서면 이내 貪탐, 嗔진, 痴치에 물들어 버린다.
죽음을 마다않고 수행하여 각(覺)을 이룬 석가모니, 예수님도 세상살이와 접하고서는 다시금 닦아야만 했다,
깨끗하면 할수록 몸과 마음은 더욱 쉽게 더러워진다.
도고마성(道高魔盛)이란 말은, 도(道)가 높으면 높을수록 마(魔)도 극성을 부린다 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깨달았다면 그걸로 끝(頓悟頓修)일 거란 생각은 어림도 없는 얘기인 것이다.
http://cafe.daum.net/revelation1/DqOn/5047
'아리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 (0) | 2020.04.16 |
---|---|
범사에 감사하라 (0) | 2020.04.15 |
삼일신고 (三一神誥) (0) | 2020.01.01 |
생활속 道 (0) | 2019.12.27 |
문군(問君) / 問君 人生 何所貴 (0) | 2019.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