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빈의 의의(意義)
현빈은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며, 이 곳에 이르러야만 도(깨달음)를 얻을 수 있다. 어느 종교의 어떠한 수행방식을 택하든 또는 현빈을 어떠한 용어로 표현하든, 이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깨달음(진리)을 얻을 수 없다.
다른말로 "입정(入靜,入定)에 든다", "참선(參禪)에 든다", "삼매(三昧,三昧境)에 든다" 라고 말하는 것들이 바로 현빈을 두고 하는 말이며, 조식수행의 근본적인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정신수행에 있어서 한 경계에 오르면 이 문을 통하여 선계(仙界)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조식수행에서 현빈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 용어이며,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수행자들이 목표로 삼아야 할 길이다.
도가에서 이 문은 선계(仙界)로 들어가는 문이다. 우리 마음 속 누구에게나 있는 한 알의 씨앗을 싹 틔워, 수행으로 열심히 길러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면 들어가게 되는 문이다.
도를 얻었다는 것은 현빈에 드는 것을 뜻하며, 조식수행에서 일차적인 성공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조식수행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 용어이다. 그런데 흔히들 현빈을 단전이라고 잘못 알고들 있다. 이유는 현빈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데서 나온 소치이다.
현빈은 도덕경에 나오는 도가의 핵심적인 전문용어이며, 현빈을 올바르게 이해하여야 마음을 비워서 어떻게 도를 얻을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현빈을 이해하지 못하면 도(道)가 무엇이고, 깨달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선문답과 같이 여전히 아리송한 뜬구름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현빈은 문이며 하늘과 땅의 경계이다.
현빈은 대주천시 기가 백회를 통과하고 나면, 즉 현빈일규를 이루고 난 후에 입정에 들게 되면 나의 본신(本神)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무한히 커다란 삼태극이 왼쪽으로 끊임없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또한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히 깊고 텅 빈 세 개의 골짜기가 삼태극을 형성하며 쉬임 없이 돌아가고 있다.
이 삼태극이 곧 현빈이다.
현빈의 색은 마치 갓 구워낸 기왓장과도 같은 색으로 흑(黑)과 백(白)의 중간색이다. 빛바랜 아스팔트나 코끼리 피부색이나 진흙의 색과 같다.
이 삼태극의 한 곳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곳이 곧 선계(仙界)인데 삼태극은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 곳은 하늘과 땅의 경계이며,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문인 것이다. 이 곳을 통하지 않고는 선계에 들어 갈 수 없으니 현빈에 대한 설명 없이 선계(仙界) 운운하는 것은 모두가 잘못된 것이다.
도가에서 최고(最古)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6장(章) 성상(成象)편에 현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일반적인 해석과 원문을 먼저 보고 난 후에 이를 좀 더 검토해 보자.
이 문장은 어떻게 도에 이르게 되는가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므로 자세히 풀어볼 필요가 있다.
- 일반적 번역 -
"골짜기 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현묘한 암컷(현빈)이라 한다. 현묘한 암컷의 문을 하늘과 땅의 근원이라 한다. 면면히 존재하지만 그 작용은 지침이 없다."
곡신(谷神)
도덕경에서 곡신(谷神)이라고 한 이유는 삼태극이 세 개의 골짜기로 형성되어 있으므로 곡(谷)이라 하였고, 그 자체가 신(神)이기 때문에 곡신(谷神)이라 한것이다. 즉 곡신(谷神)은 뒤에 나오는 현빈(玄牝)의 모양을 설명한 것이다.
왕필(王弼)은 곡신(谷神)에 대해서 '골짜기는 가운데가 텅 비어 있어서 형체도 그림자도 없으며, 거슬림도 위배됨도 없다'고 하였다.
현빈(玄牝)의 의미
현빈(玄牝)은 노자(老子)가 사용한 도가(道家)의 전문용어이다. 현(玄-검을 현)과 빈(牝-암컷 빈)은 어떤 글자인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玄-검을 현'은 동양에서 아득하고 어두운 하늘의 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한자에서 '玄'은 '검을 현'이라고 하나, 아주 까만 흑(黑)이 아니고 흑(黑)보다는 옅은 거무스레한 색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牝-암컷 빈'은 주역에 보이는 글자이다. 주역에서 건(乾)은 하늘이고 곤(坤)은 땅을 의미한다. 주역에서 '곤(坤)은 빈마지정'이라 하였다(牝馬之貞-직역하면 '암말의 바름이다'로 되나 한마디로 '음(陰)'이라는 뜻). 이 빈(牝)이라는 글자는 주역에서 비롯되어 음(陰)의 의미로 여러 문헌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도덕경에서의 현빈의 진정한 의미는 도(道)를 양(陽)으로 볼 때 도에 대한 음(陰)의 개념이다.
불가(佛家)에 비유하면 도(道)는 법신(法身)이며, 현빈은 보신(菩身)이 된다. 즉 현빈은 불가의 보살(菩薩)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덕(德)은 응신(應身)이 된다.
불가(佛家) |
법신(法身) |
보신(菩身) |
응신(應身) |
도가(道家) |
도(道) |
현빈(玄牝) |
덕(德) |
현빈은 문(門)이다
일반적으로는 현빈지문(玄牝之門)을 '현빈의 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서 '之'를 '∼의'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 대명사로서 '이, 이것(是,此)'으로 해석하여야 도덕경의 앞뒤가 맞게 된다. 즉 현빈에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빈 자체가 문이 된다. 따라서 위 문장은
"현빈이라고 하는 이 문은 일컬어서 하늘과 땅의 근원이라 한다."
로 해석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도덕경에 나오는 위 문장의 전체적인 해석은
"골짜기신은 영원하며, 이것을 일컬어 현빈이라 한다. 현빈은 문이며, 하늘과 땅의 근원이 된다. 면면히 존재하지만 그 작용은 지침(끊임)이 없다."
와 같이 할 수 있다. 도덕경에서 위 문장은 도는 텅 비어있기 때문에 그 작용이 무한하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한편 용호비결에서는
至於工夫稍熟(지어공부초숙)하야
得其所謂玄牝一竅(득기소위현빈일규)면 百竅皆通矣(백규개통의)니라
[번역]
- 공부가 점차 성숙되어 이른바 '현빈일규'(현빈이 한 구멍을 얻음)를 얻게 되면 모든 구멍이 다 통한다. -
이라고 했다. 여기서 구멍은 인체에서 기가 소통하는 통로를 말한다. 그리고 백 가지 구멍은 구멍이 백 개라는 뜻이 아니고 모든 구멍을 의미한다.
백회(百-100 會-모이다) 또한 백 개의 구멍이 모여서 백회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구멍(통로)이 모이는 곳이므로 백회라고 한다.
현빈일규는 문자 그대로 하늘의 현빈에 하나의 구멍이 열린다는 것이며, 백규개통(百竅皆通)은 백회가 열려 현빈과 통하게 되면 이 때 들어오는 하늘의 기운으로 인체의 모든 구멍이 뚫린다는 의미이다.
현빈을 단전으로 오해하여 소주천 시작할 때 기가 단전에서 구멍을 열어 좌협으로 이동하는 것을 현빈일규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때에는 기의 이동이 비로소 시작하는 초보단계이며 기가 완전하게 소통되지는 않는다. 백회가 열려야 비로소 기가 온 몸으로 막힘 없이 구석구석 통하게 된다.
백회가 열리고 나면 피부의 탄력이나 투명도가 눈에 띄게 달라지며 주름살도 펴지는 등 신체에 많은 변화가 확연하게 일어난다. 이것은 그 동안 막혔던 기의 모든 통로가 완전하게 뚫렸다는 증거이다.
현빈을 단전이라 하고 현빈일규를 기가 좌협으로 밀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주장의 근거를 용호비결에 두고 있다. 그러나 용호비결 그 어느 구절에서도 이러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현빈일규를 직접 체험하지 못한 소치이며 그러한 결과 용호비결을 제대로 해독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현빈은 상(象)이다
현빈은 도덕경에서의 목차의 제목(성상成象)이 말해 주듯이 도가 만들어 낸 상(象)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현빈이며, 하늘에 있어서는 하늘의 문인 삼태극(三太極)을 의미하고, 사람에 있어서는 하늘과 연결될 수 있는 문인 백회(百會)를 의미한다.
도(道=虛)와 현빈과 깨달음(道의 묘용妙用을 알게 됨)을 체상용(體象用-삼위일체)의 구성으로 이해하면 현빈은 도가의 전문용어이다.
불가(佛家) |
체(體) |
상(象) |
용(用) |
도가(道家) |
도(道) |
현빈(玄牝) |
덕(德) |
이 된다.
따라서 도덕경은 도경(道經)에서 도의 체(體)에 해당하는 부분을, 덕경(德經)에서 도의 용(用)에 해당하는 부분을 각각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위 문장은 비록 도경(道經)에 포함된 문장이지만 도의 상(象)에 대하여 설명한 문장이다.
1부에서 정기신을 줄여서 정신이라고 한다고 잠깐 언급하였듯이 체상용(體象用)도 줄여서 체용(體用)이라고 한다. 주역에서는 체(體)와 용(用)을 주로 분석한다. 도덕경에서도 상(象)을 달리 구분하지 않고 이 곳에서 설명하였다.
도덕경의 위 문장은 성상(成象)이라는 제목이 말해 주듯이 도의 상(象)을 설명하는 문장이며, 도의 상(象)은 구체적으로 현빈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문장이다.
즉 도의 상(象)은 구체적으로는 현빈인데, 그 것은 하늘의 삼태극으로서 도의 용(用-작용)을 주관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의 도는 삼태극을 통하여 사람의 백회와 연결하여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왜 상(象)이라 했는가?
노자의 도덕경은 도와 상(象) 그리고 덕(德)의 삼위일체 논리로 기술되어 있다. 불가에서는 체(體), 상(象), 용(用)의 논리로 되어 있다.
도가보다는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느낌이다.
체(體)는 도덕경 본문에는 보이지 않으나 상(象)과 용(用)은 본문에 나오는 글자이다. 도덕경에서는 "도(道)는 비롯됨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며 상(象)의 앞"이라고 했다.(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따라서 상(象)은 도(道)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여 답하고자 한다.
상(象)은 코끼리를 뜻하는 글자이다. 삼위일체의 논리를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像(형상 상)을 써야 옳을 것 같다. 그런데 '코끼리 상'이라는 글자를 사용했다. 왜일까?
사마천의 사기(史記) 기록으로 보면 대륙에서 도덕경은 불경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있다. 불가에서 도가의 상(象)을 다른 글자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따랐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서 불가에서는 코끼리를 신성한 동물로 여기고 있다. 왜일까? 이것은 삼태극을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다.
삼태극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무한히 커다란 세 개의 골짜기로 되어 있으며, 그 색이 마치 코끼리의 피부의 색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도덕경에서 곡신(谷神)이라 표현했고 코끼리 상(象)이라는 글자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불가에서도 코끼리의 피부의 색과 같은 삼태극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으므로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백회를 이환(泥丸: 진훍 이, 알약 환)궁이라고 하는 유래도 삼태극의 모양에 근거를 두고 있다. 위에서 삼태극이 코끼리의 피부의 색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진흙의 색과 흡사하다. 따라서 삼태극을 코끼리 상(象)이라고 한 이유와 마찬가지로 이환궁은 진흙의 색을 본받아 만든 글자이다. 환(丸)이라고 한 이유는 백회가 환약(丸藥)처럼 둥글기 때문이다.
연꽃이 피는 진흙
연꽃을 신성(神聖)시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연꽃이 사는 곳이 진흙이다. 진흙은 삼태극을 상징하고, 연뿌리는 내부가 비어 있으므로 허(虛)를 상징한다. 그리고 수행자의 몸에서 원신(元神)을 길러 백회로 출태(出胎)되는 모습이, 마치 연꽃이 필 때 꽃 봉우리가 수면위로 올라와 꽃이 피는 그 모습과 흡사하다. 이처럼 연꽃은 도(道)에 대한 핵심이 아주 잘 함축되어 있으므로 신성시하는 것이다.
하늘의 삼태극과 인간의 백회는 크기만 다를 뿐 그 모양은 같다. 따라서 현빈은 하늘에서는 삼태극이며, 인간에게는 삼태극에 대응하는 백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수행의 한 단계를 넘어 삼태극에 가보면 무한히 크고 칠흑같이 어두운 세 개의 골짜기가 서서히 왼쪽으로 돌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하늘을 '검을 현(玄)' 자를 사용한 이유나 이환궁(백회)이라 할 때의 '진흙 이(泥)'나 '코끼리 상(象)'이라고 한 근거가 모두 하나로 통하고 있으며 하늘로 상징되는 삼태극의 색에서 유래한 것이다.
삼태극은 우주선을 타고 가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선으로 온 우주를 뒤진들 그 어디에서도 삼태극을 볼 수는 없다. 살아있는 사람은 수행자가 출태시킨 원신(元神)과 본신(本神)만이 삼태극을 볼 수 있으며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영혼이 천상으로부터 이 문(삼태극)을 통하여 인연이 있는 육신에게 접하게 되어지며, 사람이 수명을 다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면 영혼은 이 문(삼태극)을 통하여 다시 천상으로 오르게 된다.
삼신할미
우리에게 친숙한 '월하노인(月下老人)과 삼신(三神)할미'의 설화(說話)가 있다. 월하노인이 벌여놓은 남녀의 인연은 삼신할미의 노력을 통해서 맺어진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설화는 도가 세상에 펼쳐지는 이치를 의인화(擬人化)시켜서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월하노인은 궁극의 깨달음이고 도이며 또한 비롯됨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우주의 주재자를 상징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따라서 삼신할미는 바로 삼태극이며 현빈이다.
삼신할미에서 삼신(三神)은 세 개의 골짜기(곡신谷神)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삼매三昧
우리가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리고 어떤 일에 몰두하였을 때 삼매(三昧)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매(三昧)라는 한자의 어느 글자에서도 몰두한다는 뜻은 없다. 그런데 삼매(三昧)는 몰두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유래가 도(道)에 있기 때문이다.
'삼매(三昧)에 든다'고 할 때에 삼매(三昧)는 삼태극이며, 도덕경에서 말하는 현빈(玄牝)이며, 반야심경의 반야바라밀다이며, 민속설화에 나오는 삼신할미이다. 따라서 '삼매경(三昧境)에 든다' 함은 현빈(삼태극)에 든다는 말을 두고 하는 것이다.
三(셋 삼) 昧(새벽 매, 어두울 매)
매(昧)는 새벽에 동트기 전에 어둑어둑하고 컴컴한 상태를 의미하는 글자이다. 새벽은 밤과 낮의 경계로서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면서 밤과 낮을 포괄하게 된다. 즉 매(昧)가 상징하는 것은 밝음과 어두움의 경계이다.
색(色)과 공(空)의 경계, 유(有)와 무(無)의 경계, 용호비결에서 말하는 태극이 갈리기 이전의 경지에 있는 것 같은 경계(已在於太極未判之前矣)는 모두 하나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정신수행(조식수행)에서 '경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행의 목표가 다름 아닌 바로 이 경계에 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밝음과 어두움의 경계를 상징하는 매(昧)라는 글자 앞에 삼(三)이라는 글자를 붙인 이유는 현빈이 삼태극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입정에 들어 삼태극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삼매(三昧)에 들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삼매와 입정, 참선은 모두 같은 경계를 의미하는 용어이며, 이 때 수행자의 호흡이 없는 듯한 경지에 드는데, 이를 두고 무호흡지식에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수행 중에 마음을 완전히 비워 자신의 존재도 잊을 정도의 몰입이 삼매(三昧)가 아니며, 삼매(三昧)는 이 보다 훨씬 더 나아가서 현빈일규를 이룬 후에 드는 입정(入定)상태를 삼매(三昧)에 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용어의 배경
삼위일체의 구성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면 도가(道家)는 도상덕(道象德)이라 하고, 불가(佛家)에서는 체상용(體象用)이라 한다. 두 가지 구성으로만 파악한 것이 도가에서는 도덕론, 불가에서는 체용론, 유가(儒家)에서는 이기론(理氣論)이라 한다
그런데 도덕론이라는 명칭보다는 체용론, 이기론 이라는 명칭이 보다 널리 사용되어 왔다. 그 이유는 아마도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도가의 특성상 유가나 불가보다는 세상일에 소극적이었던 데에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이하에서는 유불선(儒佛仙)의 용어를 비교해 봄으로써 동양의 유불선의 사상이 서로간에 어떻게 연결되고 통하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아 조식수행의 좌표를 짚어보고자 한다.
체용론의 등장
체용론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한대(漢代)이다. 정현(鄭玄)은 〈예기 禮記〉 서(序)에서 "마음을 통제하는 것을 체(體)라 하고 그것을 실천하고 행하는 것을 용(用)이라 한다"고 하여 체용(體用)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였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하안(何晏)· 왕필(王弼) 등에 의해서 본말(本末)론으로 발전하였다. 본말론의 개념은 중국 체용론의 원형이 되었다.
불가의 체용론
중국에 불교가 전파되면서 본말론은 다시 체용론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적으로 더욱 체계화되고 발전하였다.
체는 사물의 본체, 근본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며, 용이란 사물의 작용 또는 현상, 파생적인 것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체용론은 체상용(體象用)의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보통 상(象)을 빼고 체용론이라 한다. 도상덕(道象德)이 체상용(體象用)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뿐 삼위일체 구성의 논리적인 실질은 동일하다.
체(體)가 상(象)을 빌어서(통해서) 용(用)을 펼치는 것이 삼위일체 구성이다. 이 책의 1부에서 본 천지인(天地人)의 논리이다.
상(象)은 단순히 사물의 형상을 말한다. 사람에 비유하면 상(象)은 단순히 외모를 말한다. 이에 비해 그 사람의 성격, 인간성, 지식, 사회적 지위 … 등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내면의 모든 것이 체(體)가 되고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용(用)이 된다.
유가의 이기론
송(宋)대에 성립된 유가(儒家)의 성리학은 이 불교적 체용론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인간의 성정(性情)을 이기론(理氣論)으로 설명하였으므로 성정과 이기의 앞 글자만을 따서 성리학(性理學)이라 한다.
이를 집대성한 사람이 주희(朱喜)이므로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性)은 4단(四端-仁義禮智)으로 인간의 본성을 말하며 이 것은 이(理)의 발동이라고 한다. 정(情)은 기(氣)가 발동한 것이며, 중용(中庸)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세분되어 7정(七情-喜怒哀懼愛惡慾)으로 되었다.
조선의 성리학
주희는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하는 것이며,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하는 것으로 설명하여 양자를 구분하긴 했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의 이기(理氣) 분속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지는 않았다. 사단과 칠정의 이기 분속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룸으로써 성리학의 심성론을 한층 발전시킨 것이 우리나라의 사단칠정논쟁이다.
사단칠정 논쟁
이황과 그의 제자인 기대승(奇大昇)은 8년에 걸쳐 편지로 논쟁하였는데, 유명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이다. 이 때 이황은 기대승을 제자로 대하지 않고 대등한 학자로 대우하였다고 한다.
퇴계 이황(李滉)은 사단(四端)은 이(理)의 발동이고, 칠정(七情)은 기(氣)의 발동이라고 하였다. 기대승(奇大昇)은 이에 반론을 제기하고 칠정(七情)이 발해서 절도에 맞으면 그것이 사단(四端)이 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이황은 이(理)가 작용하여 기(氣)가 이에 따르기도 하고, 기(氣)가 작용하여 이(理)가 그 위에 타기도 한다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적인 이기호발(理氣互發)설로 수정하였다.
사칠논쟁(四七論爭) 이후 구봉 송익필(宋翼弼)과 율곡 이이(李珥)는 스스로 활동 작용하는 것은 기(氣)뿐이라 하여 이황의 이기호발(理氣互發)설을 부정하며 기일원론(氣一元論)으로 발전한다. 서경덕(徐敬德)의 태허설(太虛設)과 같은 맥락이다.
하고 싶은 말
도(道)라고 하는 데서 덕(德)이 생겼으므로 도덕(道德)이라 하였다. 이 논리가 불가(佛家)에서는 체용론(體用論)으로 유가(儒家)에서는 이기론(理氣論)으로 사용되었다. 이기론은 인간의 성정을 탐구하는 성리학(性理學)으로 발전하였다.
성리학(주자학)은 사칠논쟁으로 우리나라에서 꽃을 피웠으며, 이(理)와 기(氣)의 역할이 대등한가 아닌가에 따라 이기이원론과 기일원론으로 구분되었다. 구한말(舊韓末)에는 최제우(崔濟愚), 손병희(孫秉熙)에 의해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사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도덕(道德), 체용(體用), 이기(理氣), 성정(性情) 등의 용어와 학문은 그 출발을 도에 두고 있다. 시대에 따라 이름을 바꾸고 사상을 바꾸어 새롭게 태어났을 뿐 도의 근본은 달라진 것이 없다.
도를 통하여 하늘의 이치를 깨닫는 방법이 우리 천산민족의 조식법이다.
깨달음을 얻은 우리의 선조들은 홍익인간의 이념에 따라 그 뜻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그것은 우리의 문화와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속담에서 일상용어까지 도는 우리 민족의 풍속과 예법 등 생활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다. 천부경(天符經)으로 시작되는 우리의 문화는 도의 문화이다.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은 도에서 출발하여 도로서 계승되어 왔다.
조선 중엽 사칠논쟁(四七論爭)으로 활짝 피었던 우리 문화가 구한말(舊韓末)에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다시 태어났으나 불행하게도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우리의 문화는 친구가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의 문화가 아니다. 흑백이 화합하여 다시 3(三)으로 태어나는 도의 문화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서구 문명이 들어오면서 물질만능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컴퓨터로 대변되는 물질문명의 발달은 우리의 몸을 편하게 해줄 수는 있지만, 우리의 정신을 자유롭게 해주지는 못한다. 진정한 자유는 도에 순응하여 하늘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하늘에 맞추어야 얻을 수 있다.
태초에 천지가 개벽 한 이래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영원불멸한 것이 도이며 하늘의 이치이다.
이에 비해 이승을 다 살면 죽어야 하는 것이 짧은 우리들의 인생이다. 짧은 인생에서도 수없이 변하는 우리들의 마음에 하늘이 그 뜻을 맞추어 주지는 않는다.
마음의 평화가 뒷받침되지 않는 물질의 풍요로움은 모래 위에 쌓는 성과도 같은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내 안의 참(眞) 나를 찾아서 하늘과 내가 하나임을 확인하는 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