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15권, 3년(1472 임진 / 명 성화(成化) 8년) 2월 6일(계유) 7번째기사
황해도 관찰사 이예가 삼성당의 사적을 기록하여 올리다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예(李芮)가 치계(馳啓)하기를, |
“신이 전번의 하유(下諭)로 인하여, 문화현(文化縣)의 옛 노인 전 사직(司直) 최지(崔池)·전 전직(殿直) 최득강(崔得江)을 방문하고 삼성당(三聖堂)의 사적(事跡)을 얻어 그것을 조목으로 기록하여 아룁니다. |
1. 속언(俗諺)에 전하기는 단군(檀君)이 처음 신(神)이 되어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사우(祠宇)는 패엽사(貝葉寺)의 서쪽 대증산(大甑山)의 불찰(佛刹)에 임하여 있었다가 그 뒤에 절 아래 작은 봉우리[小峯]로 옮겼고, 또 다시 소증산(小甑山)으로 옮겼다 하는데, 곧 지금의 삼성당(三聖堂)입니다. 대증산(大甑山)과 패엽사(貝葉寺) 아래의 작은 봉우리에 지금은 당기(堂基)가 없고, 따라서 그 때 치제(致祭)한 것과 또 삼성(三聖)도 아울러 제사지냈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
1. 단군(檀君)과 아버지 환웅(桓雄), 할아버지 환인(桓因)을 일컬어 삼성(三聖)이라 하고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다가, 제사를 폐한 뒤로부터 당우(堂宇)가 기울어져 무너졌었는데, 경태(景泰) 경오년2023) 에 이르러 현령(縣令) 신효원(申孝源)이 중창(重創)하고, 무인년2024) 에 현령(縣令) 매좌(梅佐)가 단청(丹靑)을 베풀었습니다. |
1. 삼성당(三聖堂)에 환인 천왕(桓因天王)은 남향(南向)하고, 환웅 천왕(桓雄天王)은 서향(西向)하고, 단군 천왕(檀君天王)은 동향(東向)하여 다 위패가 있습니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날에는 모두 목상(木像)이 있었는데, 태종조(太宗朝)에 하윤(河崙)이 제사(諸祠)의 목상(木像)을 혁파할 것을 건의하여 삼성(三聖)의 목상도 또한 예(例)에 따라 파하였다 하며, 의물(儀物)의 설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
1. 삼성당(三聖堂)의 서쪽 협실(夾室)에는 구월산 대왕(九月山大王)이 가운데 있고, 왼쪽에 토지 정신(土地精神)이, 오른쪽에 사직 사자(四直使者)가 있는데, 그 위판(位板)은 모두 남향하여 있습니다. |
1. 예전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없었는데, 매좌(梅佐)가 삼성당(三聖堂) 아래에 초옥(草屋) 수칸을 지어 치도(緇徒)2025) 로 하여금 거주하게 하고, 제사 때는 여기에서 재숙(齋宿)하고 제물(祭物)도 또한 여기에서 장만하였습니다. |
1. 삼성당의 서북쪽 3리(里) 쯤에 두 절이 있고, 5리 쯤에 한 절이 있고, 동북쪽 4리 쯤에 한 절이 있습니다. |
1. 패엽사(貝葉寺)도 또한 삼성당 서쪽 6리 쯤에 한 고개와 한 시내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
1. 삼성당의 제기(祭器)는 옛적에는 금·은(金銀)을 사용하였는데, 왜란(倭亂) 이후 사기(沙器)를 쓰다가 매좌(梅佐)가 비로소 유기(鍮器)를 만들었습니다. |
1. 묘우(廟宇)를 평양(平壤)으로 이전한 뒤로는 이 당(堂)의 제사를 폐지한 것이 벌써 60여 년이 되었다 하고, 혹은 태종조(太宗朝) 경진년2026) ·신사년2027) ·임오년2028) 사이라고도 하니, 어떤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으며, 향(香)을 내려 치제(致祭)한 의궤(儀軌)도 또한 상고할 수 없습니다. |
1. 구월산(九月山) 상봉(上峯)에는 천왕당(天王堂)이 아니고 이름을 사왕봉(四王峯)이라 하며, 또한 예전에 향(香)을 내려 치제(致祭)하던 곳이 있었는데, 태종(太宗) 을미년2029) 사이에 처음 혁파하였다 하나 그 당기(堂基)를 일찍이 본 사람이 없고, 이제 또한 얼음이 얼어 위험하여 사람이 올라갈 수도 없습니다. |
1. 《관서승람(關西勝覽)》에 문화현(文化縣) 고적(古跡)을 기재하기를, ‘구월산(九月山) 아래 성당리(聖堂里)에 소증산(小甑山)이 있는데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의 삼성사(三聖祠)가 있고, 구월산(九月山) 마루[頂]에는 사왕사(四王寺)가 있는데, 옛적에 성수[星宿]에 초례(醮禮)2030) 하던 곳이다.’ 하였습니다. |
1. 삼성당(三聖堂)을 평양으로 옮긴 뒤로부터 비록 국가에서는 치제(致祭)하지 않았으나, 기우(祈雨)·기청(祈晴)을 할 때는 현관(縣官)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친히 제사지내며, 제사에는 백병(白餠)·백반(白飯)·폐백(幣帛)·실과(實果)를 쓰고 이 밖에 다른 제사는 행할 수가 없는데, 고을의 풍속에는 영험(靈驗)이 있다고 일컬어 사람들이 감히 와서 제사하지 못합니다. |
1. 기우 용단(祈雨龍壇)은 삼성당(三聖堂) 아래 백여 보에 있으나, 설치한 날짜는 알지 못하고, 현(縣)에 소장된 송(宋)나라 경덕(景德) 3년 병오년2031) 5월 의주(儀注)에는, ‘떡[餠]·밥[飯]·술[酒]과 흰 거위[白鵝]를 사용하여 제사를 행했다.’고 기재되었으나, 지금은 흰 닭[白雞]을 대신 쓰고 돼지는 쓰지 않습니다. |
1. 삼성당(三聖堂) 아래 근처에는 인가가 조밀(稠密)하였는데, 제사를 파한 뒤로부터 악병(惡病)이 발생하기 시작하여 인가가 텅 비었습니다. 그러나 닭·돼지를 도살하여 신령이 싫어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
하니, 예조(禮曹)에서 이것을 근거하여 아뢰기를, |
“백성이 모두 삼성당(三聖堂)을 평양부(平壤府)에 옮기고 치제(致祭)하지 않자 그 뒤로부터 악병이 일어났다고 하니, 이는 비록 괴탄(怪誕) 무계(無稽)한 말이나, 그러나 옛 기록에, ‘단군(檀君)이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화하여 신이 되었다.’ 하였고, 지금 본도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에 그 묘당(廟堂)이 있으며, 또 전에는 향(香)을 내려 치제하였으니, 청컨대 백성의 원하는 바에 따라 평양의 단군묘(檀君廟)의 예(例)에 의하여 해마다 봄·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를 행하소서.” |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8책 634면 |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역사-전사(前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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