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40권, 10년(1428 무신 / 명 선덕(善德) 3년) 6월 14일(을미) 5번째기사
유관이 단군이 도읍한 곳을 찾아내어 의혹을 없애주기를 상서하여 청하다
우의정으로 그대로 치사(致仕)한 유관(柳寬)이 상서(上書)하기를,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은 신의 본향(本鄕)입니다.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본향에 내려온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여러 부로(父老)들의 말을 듣고 비로소 〈이 고을이〉 사적(事迹)이 오래인 것을 알았습니다. 구월산(九月山)은 이 현의 주산(主山)입니다. 단군 조선 때에 있어서는 이름을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하였고, 신라 때에 이르러 궐산(闕山)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그때에 문화현을 처음으로 궐구현(闕口縣)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전조(前朝)에 이르러서는 유주 감무(儒州監務)로 승격시켰으며, 고종 때에 이르러 또 문화 현령(文化縣令)으로 승격하였고, 산의 이름의 「궐」자를 느린 소리로 발음하여 구월산(九月山)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산의 동쪽 재[嶺]는 높고 크고 길어서 일식 정도 가야 안악군(安岳郡)에 이르러 끝납니다. 재의 중허리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북쪽 벽에는 단웅 천왕(檀雄天王), 동쪽 벽에는 단인 천왕(檀因天王), 서쪽 벽에는 단군 천왕(檀君天王)을 문화현 사람들은 삼성당(三聖堂)이라고 항상 부르며, 그 산 아래에 있는 동리를 또한 성당리(聖堂里)라고 일컫습니다. 신당(神堂)의 안팎에는 까마귀와 참새들이 깃들이지 아니하며,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날씨가 가물 때를 당하여 비를 빌면 다소 응보를 얻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으니, 아마도 단군의 도읍이 이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 ’고 합니다. 삼성당은 지금도 아직 있어서 그 자취를 볼 수가 있으나, 지금은 땅 모양을 살펴보건대, 문화현의 동쪽에 이름을 장장(藏壯)이라고 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는 말에 단군의 도읍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증험(證驗)이 될 만한 것은 다만 동서 난산(東西卵山)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이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기자묘(箕子廟)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라고 합니다. 신이 살펴본 바로는, 단군은 요(堯)임금과 같은 때에 임금이 되었으니, 그 때부터 기자에 이르기까지는 천여 년이 넘습니다. 어찌 아래로 내려와 기자묘와 합치하여야 한단 말입니까.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단목(檀木) 곁에 내려와서 태어났다 하니, 지금의 삼성(三聖)1270) 설은 진실로 믿을 수 없다. ’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또 살펴보건대, 태고(太古)의 맨처음에 혼돈(混沌)이 개벽(開闢)하게 되어, 먼저 하늘이 생기고 뒤에 땅이 생겼으며, 이미 천지(天地)가 있게 된 뒤에는 기(氣)가 화(化)하여 사람이 생기었습니다. 그 뒤로 사람이 생겨나서 모두 형상을 서로 잇게 되었으니, 어찌 〈사람이 생긴 지〉 수십만 년 뒤의 요임금 때에 다시 기가 화하여 사람이 생겨나는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그 나무 곁에서 생겼다는 설은 진실로 황당무계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감(聖鑑)으로 헤아려 결정하시고, 유사(攸司)에 명하여 도읍한 곳을 찾아내어 그 의혹을 없애게 하소서.”
하니, 보류(保留)하여 두라고 명하였다.
세종29권,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9월 25일(신유) 4번째기사
단군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하여 제사하게 하다
사온서 주부(司醞署注簿) 정척(鄭陟)이 글을 올리기를,
“지난 신축년 10월에 〈중국〉 조정이 〈북경으로〉 옮겼으니 〈의주에 있는〉 말을 점고(點考)하라는 명을 받들었습니다. 의주에 가서 말 점고하는 일을 마치고 다음해 2월에 돌아오다가 평양에 들러서 기자 사당(箕子祠堂)을 배알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자 신위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있고, 단군(檀君) 신위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있었습니다. 신이 평양부의 교수관(敎授官) 이간(李簡)에게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예전에 중국 사신이 평양에 와서 기자의 사당과 후손의 있고 없음을 묻고 기자의 묘소(墓所)에 가서 배알하였는데, 그 뒤에 나라에서 기자 사당을 문묘(文廟) 동편에 세우라고 명하였고, 또 단군으로 배향하라는 영이 있었으므로, 지금까지 이와 같이 하여 제향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단군은 당(唐)나라 요(堯) 임금과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신 분이고, 기자는 주(周) 나라 무왕(武王)의 명을 받아 조선에 봉(封)하게 된 분이니, 역사의 횃수를 따지면 요임금에서 무왕까지가 무려 1천 2백 30여 년입니다. 그러니 기자의 신위를 북쪽에 모시고, 단군의 신위를 동쪽에 배향하게 한 것도, 실로 나라를 세워 후세에 전한 일의 선후에 어긋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위에 아뢰고자 하였으나, 마침 아비의 상을 만나 미처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삽더니, 이제 신을 사온서 주부로 제수하시고 이어 의례 상정 별감(儀禮詳定別監)으로 임명하시었기에, 신이 이에 공경히 삼가 본조의 여러 제사 의식을 상고하오니, 향단군 진설도(享檀君陳說圖)에 ‘신위는 방의 중앙에서 남쪽을 향한다. ’고 하였습니다. 신이 전일에 뵈온 서향 좌차(坐次)는 이 도식(圖式)과 합치되지 않사오니, 만약 단군과 기자가 같은 남향으로서, 단군이 위가 되고, 기자가 다음이 되게 한다면, 나라를 세운 선후가 어긋나지 않을 듯하오나, 기자는 무왕을 위해서 홍범(洪範)을 진술하고 조선에 와서 여덟 조목을 만들어서 정치와 교화가 성행하고 풍속이 아름다워져서 조선이라는 명칭이 천하 후세에 드러나게 되었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께서 명나라 태조 고황제에게 국호를 정하는 일을 청했을 때, 태조 고황제는 조선이라는 명칭을 이어받기를 명하였던 것이고, 그 뒤로 중국 사신으로서 평양을 지나는 자가 혹 사당에 가서 배알하게도 된 것이니, 그런즉 명칭은 기자 사당으로 되어 있는데, 단군 신위를 모시는 것은 진실로 미편한 일입니다. 신이 또 들으니, 기자 사당에는 제전(祭田)이 있고 단군을 위해서는 없기 때문에, 기자에게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제물을 올리되, 단군에게는 봄 가을에만 제사한다 하옵니다. 현재 단군 신위를 기자 사당에 배향하게 되어서 한 방에 함께 계신데 홀로 단군에게는 초하루·보름 제물을 올리지 아니한다는 것은 또한 미안하지 않을까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단군의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하도록 하여 제사를 받들면 거의 제사 의식에 합당할까 합니다.”
하니, 이 글을 예조에 내리어 그대로 이행하도록 명하였다
세종 75권, 18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12월 26일(정해) 4번째기사
전 판한성부사 유사눌이 단군의 사당을 평양에 건립하는 것이 그릇되었음을 아뢰다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유사눌(柳思訥)이 상서하기를,
“신이 삼가 세년가(世年歌)를 보건대, 단군은 조선의 시조입니다. 그가 날 때는 사람들보다 달랐으며, 그가 죽어서는 화하여 신이 되었으며, 그가 나라를 누린 역년(歷年)의 많음은 이와 같은 것이 있지 않았습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유사에 명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문을 짓게 했는데, 그 때에는 유사가 그 사실을 살피지도 아니하고 평양에다 사당을 세우기를 청하니, 신의 숙부 유관(柳寬)이 그 그릇된 점을 변론하여 일이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신이 세년가로 상고해 보건대, 단군이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했다가 후에는 백악(白岳)에 도읍했으며, 은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서 신이 되었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1천 48년 동안 나라를 누리고, 지금도 사당이 아사달에 있네.’ 했으니, 어찌 그 근거가 없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고려에서는 구월산(九月山) 밑에 사당을 세워 그 당우(堂宇)와 위판(位版)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세년가와 합치하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서는 이 곳을 버리고 다시 사당을 다른 곳에다 세운다면 아마 그 장소가 잘못된 듯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시옵소서.”
하니, 명하여 예조에 내리게 하였다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7월 1일(무진) 4번째기사
단군 신주를 조선 시조 단군지위로 하고, 기자와 동명왕에 대해서도 고치다
조선 단군 신주(朝鮮檀君神主)를 조선 시조 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로, 후조선 시조 기자(後朝鮮始祖箕子)를 후조선 시조 기자지위(後朝鮮始祖箕子之位)로, 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를 고구려 시조 동명왕지위(高句麗東明王之位)로 고쳐 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