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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단군은 실존 하였다(개천절에)|

by 자연처럼 2015. 10. 3.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 가서

던군을 검색하면 아래 처럼 수백건의 검색건이 나온다

 

 

 

세조가 전국에 있는 고사서를 수집하여 일반인이 역사를 알지 못하도록 확책 했다

 

 

세조 7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5월 26일(무자) 3번째기사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39장 B면
【영인본】 7책 200면
【분류】 *출판-서책(書冊) / *재정-진상(進上) / *역사-편사(編史)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계연수씨가 쓴 한단고기 위서 논쟁이 많은데

이병도 제자들인 강단사학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역사가 뿌리채 흔들리니까 위서라 주장 하는 거죠.

글자 몇자 오자 났다고 그 책이 위서라면 논리가 빈약하거지요.

안함노, 원동중이 쓴 삼성기가 한단고기에 있는데 세조가 수거해간 목록에도 나오네....

 

《환단고기》는 《삼성기 상(上)》, 《삼성기 하(下)》,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의 각기 다른 시대에 쓰여졌다는 5권(4종류)의 책을 엮은 것이라 적고 있다.

  • 《삼성기》는 환웅이라 불리는 왕이 다스린 1565년 동안의 신시배달국과 그 전신이라 하는 3,301년간의 환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 《단군세기》는 47대의 단군이 2천여 년간 다스린 역사를 다루고 있다.
  • 《북부여기》는 북부여에 6명의 왕이 있었으며 이것이 고구려의 전신이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 《태백일사》는 환국, 배달국, 삼한, 고구려, 발해, 고려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단군의 언급이 많은데 그중에서 성종 때 것을 가져 왔네요

환인, 환웅,단군을 모신 삼성당 그리고 천왕당 모두 나오고 있으니까요.

단군 사당부터 제사 지내온 내력까지 주욱~

일제와 이병도가 왕조실록을 건드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거지요.

 

중국놈들은 고구려역사가지 자기네 것이라고 동북공정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왜?

실존했던 역사까지 아니라고 박빡 우기고 있을까? 

외세에 빌붙어 민족정신을 말살하고픈건지......

그러니 허구헌날 대립하고 쌈질이나 하는 지도자도 아닌 것들이 지도자입네 하면서

국민을 무지몽매하고 만들면서 우롱하고 있는 것 아닐까?

 

 

 

조선왕조실록/성종 15권, 3년(1472 임진 / 명 성화(成化) 8년) 2월 6일(계유) 7번째기사
 
황해도 관찰사 이예가 삼성당의 사적을 기록하여 올리다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예(李芮)가 치계(馳啓)하기를,
 
“신이 전번의 하유(下諭)로 인하여, 문화현(文化縣)의 옛 노인 전 사직(司直) 최지(崔池)·전 전직(殿直) 최득강(崔得江)을 방문하고 삼성당(三聖堂)의 사적(事跡)을 얻어 그것을 조목으로 기록하여 아룁니다.
 
1. 속언(俗諺)에 전하기는 단군(檀君)이 처음 신(神)이 되어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사우(祠宇)는 패엽사(貝葉寺)의 서쪽 대증산(大甑山)의 불찰(佛刹)에 임하여 있었다가 그 뒤에 절 아래 작은 봉우리[小峯]로 옮겼고, 또 다시 소증산(小甑山)으로 옮겼다 하는데, 곧 지금의 삼성당(三聖堂)입니다. 대증산(大甑山)패엽사(貝葉寺) 아래의 작은 봉우리에 지금은 당기(堂基)가 없고, 따라서 그 때 치제(致祭)한 것과 또 삼성(三聖)도 아울러 제사지냈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1. 단군(檀君)과 아버지 환웅(桓雄), 할아버지 환인(桓因)을 일컬어 삼성(三聖)이라 하고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다가, 제사를 폐한 뒤로부터 당우(堂宇)가 기울어져 무너졌었는데, 경태(景泰) 경오년2023) 에 이르러 현령(縣令) 신효원(申孝源)이 중창(重創)하고, 무인년2024) 에 현령(縣令) 매좌(梅佐)가 단청(丹靑)을 베풀었습니다.
 
1. 삼성당(三聖堂)환인 천왕(桓因天王)은 남향(南向)하고, 환웅 천왕(桓雄天王)은 서향(西向)하고, 단군 천왕(檀君天王)은 동향(東向)하여 다 위패가 있습니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날에는 모두 목상(木像)이 있었는데, 태종조(太宗朝)하윤(河崙)이 제사(諸祠)의 목상(木像)을 혁파할 것을 건의하여 삼성(三聖)의 목상도 또한 예(例)에 따라 파하였다 하며, 의물(儀物)의 설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1. 삼성당(三聖堂)의 서쪽 협실(夾室)에는 구월산 대왕(九月山大王)이 가운데 있고, 왼쪽에 토지 정신(土地精神)이, 오른쪽에 사직 사자(四直使者)가 있는데, 그 위판(位板)은 모두 남향하여 있습니다.
 
1. 예전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없었는데, 매좌(梅佐)삼성당(三聖堂) 아래에 초옥(草屋) 수칸을 지어 치도(緇徒)2025) 로 하여금 거주하게 하고, 제사 때는 여기에서 재숙(齋宿)하고 제물(祭物)도 또한 여기에서 장만하였습니다.
 
1. 삼성당의 서북쪽 3리(里) 쯤에 두 절이 있고, 5리 쯤에 한 절이 있고, 동북쪽 4리 쯤에 한 절이 있습니다.
 
1. 패엽사(貝葉寺)도 또한 삼성당 서쪽 6리 쯤에 한 고개와 한 시내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1. 삼성당의 제기(祭器)는 옛적에는 금·은(金銀)을 사용하였는데, 왜란(倭亂) 이후 사기(沙器)를 쓰다가 매좌(梅佐)가 비로소 유기(鍮器)를 만들었습니다.
 
1. 묘우(廟宇)를 평양(平壤)으로 이전한 뒤로는 이 당(堂)의 제사를 폐지한 것이 벌써 60여 년이 되었다 하고, 혹은 태종조(太宗朝) 경진년2026) ·신사년2027) ·임오년2028) 사이라고도 하니, 어떤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으며, 향(香)을 내려 치제(致祭)한 의궤(儀軌)도 또한 상고할 수 없습니다.
 
1. 구월산(九月山) 상봉(上峯)에는 천왕당(天王堂)이 아니고 이름을 사왕봉(四王峯)이라 하며, 또한 예전에 향(香)을 내려 치제(致祭)하던 곳이 있었는데, 태종(太宗) 을미년2029) 사이에 처음 혁파하였다 하나 그 당기(堂基)를 일찍이 본 사람이 없고, 이제 또한 얼음이 얼어 위험하여 사람이 올라갈 수도 없습니다.
 
1. 《관서승람(關西勝覽)》문화현(文化縣) 고적(古跡)을 기재하기를, ‘구월산(九月山) 아래 성당리(聖堂里)소증산(小甑山)이 있는데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삼성사(三聖祠)가 있고, 구월산(九月山) 마루[頂]에는 사왕사(四王寺)가 있는데, 옛적에 성수[星宿]에 초례(醮禮)2030) 하던 곳이다.’ 하였습니다.
 
1. 삼성당(三聖堂)평양으로 옮긴 뒤로부터 비록 국가에서는 치제(致祭)하지 않았으나, 기우(祈雨)·기청(祈晴)을 할 때는 현관(縣官)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친히 제사지내며, 제사에는 백병(白餠)·백반(白飯)·폐백(幣帛)·실과(實果)를 쓰고 이 밖에 다른 제사는 행할 수가 없는데, 고을의 풍속에는 영험(靈驗)이 있다고 일컬어 사람들이 감히 와서 제사하지 못합니다.
 
1. 기우 용단(祈雨龍壇)은 삼성당(三聖堂) 아래 백여 보에 있으나, 설치한 날짜는 알지 못하고, 현(縣)에 소장된 송(宋)나라 경덕(景德) 3년 병오년2031) 5월 의주(儀注)에는, ‘떡[餠]·밥[飯]·술[酒]과 흰 거위[白鵝]를 사용하여 제사를 행했다.’고 기재되었으나, 지금은 흰 닭[白雞]을 대신 쓰고 돼지는 쓰지 않습니다.
 
1. 삼성당(三聖堂) 아래 근처에는 인가가 조밀(稠密)하였는데, 제사를 파한 뒤로부터 악병(惡病)이 발생하기 시작하여 인가가 텅 비었습니다. 그러나 닭·돼지를 도살하여 신령이 싫어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예조(禮曹)에서 이것을 근거하여 아뢰기를,
 
“백성이 모두 삼성당(三聖堂)평양부(平壤府)에 옮기고 치제(致祭)하지 않자 그 뒤로부터 악병이 일어났다고 하니, 이는 비록 괴탄(怪誕) 무계(無稽)한 말이나, 그러나 옛 기록에, ‘단군(檀君)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화하여 신이 되었다.’ 하였고, 지금 본도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에 그 묘당(廟堂)이 있으며, 또 전에는 향(香)을 내려 치제하였으니, 청컨대 백성의 원하는 바에 따라 평양단군묘(檀君廟)의 예(例)에 의하여 해마다 봄·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를 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4책 15권 10장 B면
【영인본】 8책 634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역사-전사(前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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