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윷놀이의 유래와 의미

by 자연처럼 2011. 2. 8.

윷놀이의 유래와 의미  

 

우리나라의 옛 사람들은 설을 앞뒤로 하여 겨울 내내 윷놀이를 즐긴다.

그야말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쉽게 할 수 있어 ‘국민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두 편 혹은 세 편으로 갈라서서

윷가락을 던지고 떨어져 나오는 대로 행마(行馬)해서 먼저 네 개의 윷말(넉동)을 빼는 쪽이 이긴다.

 

이겨도 좋고 져도 좋은 신명나는 한 판.

‘乙矢口(을시구) 節矢口(절시구)’하며 양쪽 모두 어깨춤을 추며 신명을 낸다.

사람들은 설날에 윷놀이로써 즐겁게 새해를 맞이하였고, 그리고 이 놀이는 대개 보름까지 이어졌다.

 

윷놀이는 한자로 척사(擲柶) 또는 사희(柶戱)라 한다.

또 윷을 '나무 네 조각'이란 뜻으로 한자로는 '사(柶)'라 하였다.

 

윷놀이는 어디까지나 우리 고유의 놀이다.

중국에도 저포(樗蒲), 격양희(擊壤戱)가 있고 만주와 몽골에도 비슷한 놀이가 있으나

그 방식도 다르고 널리 유행하지도 않았다 한다.


 

그러면 윷놀이는 어디서 유래됐고 윷판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윷판[馬田]은 '말밭' '말판' '윷밭'이라고도 한다. 윷판을 한자로 ‘사도(柶圖)’ 라 쓰기도 한다.

윷판 전체의 모양도 ‘밭전(田)’자 형이고 쌍방이 각각 말 4개를 가지고 승부를 겨루므로

윷판을 '말판' 또는 '말밭(馬田)' 이라고 한다.

 

양편 중에 말 4개가 모두 첫밭인 ‘도’에서 출발하여 끝밭을 먼저 빠져 나가는 편이 이기는 것이다.

놀이 풍속에 4말을 빼는 것을 ‘넉동 뺀다’고도 말하니 말을 '동'이라고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윷놀이는 윷을 잘 던지기만 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말판을 쓰는 것도 매우 중요한 승리의 관건이다.

남의 말에 잡히지 않으면서 가장 가까운 길로 가되,

자기 말끼리 덧놓아 '두동산이(두동문이)'나 '석동산이(석동문이)' 많게는 '넉동산이'를 만들어

한 번에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매우 빨리 날 수 있는 것이다.

 

 

윷판은 선과 29개의 검은 점을 찍어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점대신 다른 모양이나 내용을 적어 놓기도 한다.

윷판은 바깥 둘레를 네모지게(方) 한 것은 하늘의 운기(運氣)가 땅에서 이루어짐을 상징한 것.

즉 천지음양의 합일한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29개의 점 중, 가운데 한 점은 북극성(樞星)이고 둘레의 28점은 28수(宿)를 의미한 것이다.



그러면 언제부터 윷놀이가 시작되었을까?

 

첫째, 윷판이 중국의 고사인 "漢沛公西入定關中 … 楚覇王南出潰圍中" 이라는 글귀에서

나왔다는 주장이다.

둘째, 《조선상고사》 에서 신채호가 주장한 오가(五加)의 출진도(出陣圖)에서 나왔다는 설이다. 
도 · 개 · 걸 · 윷 · 모 등이

부여의 관직명인 마가(馬加) · 우가(牛加) · 저가( 加) · 구가(狗加) 등의 가(加)와 유사함을 들어,

그 기원을 고대 부여에 두면서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부여의 지배체제(官制)는

제가(諸加)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저加) 구가(狗加)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곧 각기 말, 소, 돼지, 개를 상징으로 하는 집단이 각기 한 구역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이들 제가(諸加)는 각기 사방을 경계지은 사출도(四出道)를 맡았다.

사출도는 전시체제에서 군사조직의 출진도(出陣圖) 모형이라고 한다.


셋째, 16세기 선조 때 김문표(1568∼1608)가

이규경의《오주연문장전산고》의 '사희변증설'과 《중경지》에 보이는 바와 같이,

천지 · 하늘의 추성(북극성) · 28수 등을 본떠 만든 것이 윷판이고,

말의 이동은 해가 움직여 동지 · 춘분 · 추분 · 하지를 이루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주장이다.

넷째, 조선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은 “고려의 유속으로 본다”고 했으나

다섯째, 최남선은 그 기원을 신라시대 이전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위의 견해 가운데 아직 명확히 윷판의 유래를 밝혀내 정설화된 것은 없는 실정이다.

 

윷판에 올릴 말은 대개 한 편에서 네 개를 가지고 한다.

나무조각이나 돌, 기타 특별히 만든 것을 상대편과 구별되도록 이용하였는데,

윷이 나는데 따라 말을 옮겨 놓는 것을 '말을 쓴다'고 한다.

 

한편 지방에 따라서는 윷판이나 말 없이 노는 윷놀이도 있다.
평안 · 함경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산윷[算柶]' 또는 '보습윷'이라고도 하는 윷놀이는

윷판과 말이 없이 노는데,

산가지나 콩 · 팥 등을 늘어놓았다 윷을 던져 나온 수대로 그것을 거둬들여

많이 차지하는 편이 이기는 '산가지 따기' '콩따기'

또는 먼저 다섯 손가락을 다 꼽는 사람이 이기는 '손가락 꼽기'와 같은 방식으로 노는 것이다.

또 영남지방 농민들 사이에서 '벌윷'이라 하여 윷판 없이 그냥 윷가락을 가지고 노는 경우가 있고,

이와는 다르지만 경북 안동지방에는 '건궁윷말'이라 하여 말판을 사용하지 않고

말판을 머리 속에 그려 놓고 그 말판 명칭을 이용하여 윷말을 운영하는 방식

즉 말판없이 서로 말[口語]로 윷말을 쓰는 놀이가 있다.

 



- 신채호 “부여국서 시작된 고유놀이” -

윷의 도는 돼지의 저가, 개는 구가, 윷은 우가, 모는 마가를 표시하고 있으나

걸은 의문으로 남겨둔다고 했다.

걸은 임금자리인 기내(畿內)의 벼슬아치(양을 상징)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곧, 도는 돼지(豚)를, 개는 개(犬), 걸은 양(羊), 윷은 소(牛), 모는 말 (馬)을 가리킨 말이다.

이때 行馬(행마)하는 법이

이들 가축의 이름이 이용되면서, 몸의 크기와 걸음의 속도가 윷놀이에 반영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시 부여가 수렵시대를 지나고 농사와 목축을 하는 시대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풀이했다.

 

윷은 가락윷(채윷) · 밤윷(좀윷) · 콩윷(또는 팥윷)으로 크게 나눌 수 있고,

그밖에 상수리나 도토리 · 살구씨 · 은행 등으로도 놀게 된다.

 

가락윷[석사, 析柶]은 박달나무 · 밤나무 · 통싸리나무 또는 참나무 등을

대개 한 뼘 남짓한 길이(15∼20cm)의 곧고 둥근 모양으로 2개를 만든 후

반쪽을 내어 배가 약간 불룩한 네 가락이 되게 한다.

이는 다시 작은 윷 · 중윷(서울윷) · 장작윷(장자윷)으로 나눠지는데,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밤윷은 모양은 가락윷과 같으나 크기가 새끼손가락 정도로,

나무를 길이 2∼3cm의 밤알만 하게 만들었다하여 이름 붙여진 것이다.

이 윷은 조그만 간장종지 등의 그릇에 담아 손바닥으로 덮어 쥐고 흔들어

바닥에 밤윷만 내던지는 방식으로 논다.

주로 경상도 등지의 남부지방에서 많이 놀며,

서울의 경우 대부분 도박용으로 쓰이며 일반인들의 놀이용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콩윷이나 팥윷은 콩이나 팥알의 한쪽에 작은 구멍을 파 앞뒤를 가려보게 만들거나

절반을 쪼개 만든 윷으로,

농민들이 작업하다 잠시 쉬는 사이에 놀았는데, 주로 북부지방에서 많이 논다.

 

 

윷판은 둥근 원 안에 십자를 그리고 밭 29개를 그려놓았다.

가운데 방을 중심으로 배치한 28개마다 우리말의 이름을 붙였다.

곧 입구를 '도', 길이 갈라지는 곳을 '모', '뒷모', '찌모'라 부르며 출구를 '참먹이'라 했다.

윷판을 보면 '방'이 가장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아 중심축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런 윷판에 어느 때부터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밭마다 하늘의 별자리인 28수(宿)를 표했다.

중심인 방을 '추(樞)'라 했다.

추는 ‘가운데’ 또는 밑동과 지도리라는 뜻이며 북두칠성의 첫 별자리 이름이기도 하다.

북두칠성은 임금의 자리이며 추성은 임금별로 친다.

북두칠성은 자리를 옮기지 않아 고정불변이다. 그리하여 뭇 별이 임금별을 싸고돈다.

이런 상징성을 살려 임금은 북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남쪽에서 바라보는 신하를 마주한다.

경복궁도 임금자리를 북쪽에 배치했다. 임금이 어느 곳을 가던 이런 자리 배치는 변함이 없었다.


조선 중기에 살았던 문인 김문표(金文豹)는 <사도설(柶圖說)>에서 명쾌하게 해석을 달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윷판의 전체 주변이 둥근 것은 하늘,

중심에는 십자를 그려 모남을 그린 것은 땅을 나타낸다고 했다.

곧 천원지방(天元地方)의 천문사상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가운데 있는 별은 추성이요, 옆으로 벌려 있는 별은 28수이다.

 

28수 주위를 태양이 돌고 있으므로(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이치를 달리 표현한 말)

하루가 생기고 일년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태양이 28수를 돌 때 멀리하고 가까이 함으로 사계절이 생기듯이,

윷말이 가는 길도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다.

 

태양(해)의 진행은

북쪽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가서 가운데를 거쳐 다시 북쪽으로 나오는데

동지의 해가 짧음을 나타낸다.

즉 ‘도(첫밭)'에서 시작해서 ‘모’를 거쳐 ‘방’에서 빠져나가는 짧은 길은 동지를 의미하고,

 

북쪽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갔다가 다시 북쪽으로 나옴은

춘분의 해가 고름을 나타낸다.

즉 '도'에서 '모'를 지나 ‘뒷모’에서 '방'을 서서히 빠져나가는 길은 한낮에 이루어지는 춘분이고,

 

북쪽에서 출발하여 동쪽과 남쪽을 거쳐 북쪽으로 나옴은 추분의 방이 고름을 나타낸다.

즉 '도에서 '모'에 서고 '방'을 지나 ‘찌모’를 나간 다음 ‘참먹(끝밭)'으로 빠져나가는 길은

한 밤에 이루어지는 추분을 의미한다.

 

북쪽에서 출발하여 동쪽을 거쳐 남쪽과 서쪽을 지나고 다시 북쪽으로 나옴은

하지의 해가 길음을 나타낸다.
즉 '도'에서 '모', '뒷모', '찌모'를 지나 한 바퀴 돌아서 '참먹(끝밭)'으로 빠져나가는

가장 긴 길은 하지를 의미한다.

 

 

 

 

 

 

 

김문표(金文豹)는 <사도설(柶圖說)>에서 말발의 진행이 해와 절기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본 것이다.

곧 하늘의 별과 해, 이에 따라 땅의 계절 변화를 적용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원리에 따라 28수의 별자리를 배치했다.

그러므로 28수는 옛 기록에 적혀 있는 순서대로만 배치하지 않았다.

 

이 설명에서는 윷판의 입구를 북쪽의 방향에서 설정해 풀이했으나

여느 사람들은 남쪽(아랫쪽)을 출발점으로 삼아 놀이를 벌이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28수를 그린 윷판을 가지고 놀이를 벌이면

자연스레 별자리 이름을 익히게 되는 교육적 효과를 노린 것이다.

 

  
- 종 9품~영의정 관직 적은 윷판 '승경도' -

 

한편 별자리를 배치한 윷판과는 다른 윷판도 있었다.

종정도(從政圖) 또는 승경도(陞卿圖)이다.

이 도판은 큼직한 종이에 종9품부터 영의정까지 내직이든 외직이든 모든 관직의 이름을 써놓았다.

곧 참봉 만호 같은 하위직에서 판서 대제학 병사 수사 등 고위직을 망라하여

문관 무관을 구별치 않고 적은 것이다.

처음 출발할 때

도나 개가 나오면 좋지 않은 벼슬을 받게 되며 윷이나 모가 나오면 좋은 자리를 받는다.

그러나 벼슬살이를 계속하는 동안 좋은 말밭을 걷게 되면

고속승진이 보장되어 현관(顯官)의 자리를 누리게 된다.

하지만 나쁜 말밭을 걷게 되면 유배를 가기도 하고 파직을 당하기도 하면서 낙백의 길을 걷게 된다.

또 낮은 등급으로 강등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사약을 받은 것으로 마무리되기도 한다.

 

이는 본디 중국 쌍륙놀이를 조선 초기 하륜이 우리의 관직에 맞게 변형시켰다고 한다.

 

관료사회의 규정과 특성을 치밀한 구도로 짜서 만들었다.

물론 벼슬을 중시하는 관료사회의 산물이기는 하나

윷판의 천문사상을 인문정신으로 바꾼 한 모델이 된 것이다.

 

청소년들은 종정도를 이용해 윷놀이를 벌이면서 모든 관직을 외우게 되고

관직생활에서 조심해야 한다는 수양의 정신을 되새기게 된다.


 

1940년경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나 '조선여행 윷놀이'라는 것이 서울 상가에서 팔렸다고 한다.

일종의 개량 윷놀이로, 윷판에는 승람도와 같이 한국지도를 응용해 지명을 써넣었고,

윷판의 선 대신에 발달된 교통로가, 말 대신에 기선 · 기차 · 자동차 · 비행기라는 네 개의 교통기관이

윷판에 있는 전국의 도시와 명산대찰들을 유람하면서 경주하는 방식이었다.
이 윷판의 지명 · 산명 · 사찰명 등은 한글 · 한자 · 로마자로 기입되었고,

설명문도 영어와 일본어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윷놀이가 한 때 수난을 받은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명절’과 민족놀이를 억제하는 과정에서 윷놀이도 압제를 받기도 하였으나

광복과 함께 다시 살아나 농촌 마을과 도시를 기리지 않고 곳곳에서 마을 대항으로 척사대회를 벌였다.

또 두 사람을 단위로 놀이를 벌일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패를 갈라 놀이를 할 수도 있어서

그 겨루기 범위가 넓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부터 크게 유행했던 것이다.

따라서 윷놀이는 민중의 놀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주역 64패와 연계 윷패로 길흉 점쳐 -

윷놀이는 단순한 승부를 겨루는 유희로만 진행된 것이 아니다.

농경사회에서 농사나 신수를 점치는 예언적 의미로 변용되기도 했다.

 

윷점이 성행했다.

그 방법은 여러가지였다. 먼저 농사와 관련지어 치는 점의 방법을 알아보자.

한 동네라도 윗마을 농민은 화전농이요, 아랫마을 농민은 수전농(水田農)일 경우가 많다.

화전농과 수전농으로 패를 갈라 윷놀이를 벌인다.

이를 각기 산농(山農) 수향(水鄕)이라 부른다.

산농이 이길 경우, 그해에 홍수가 져서 수향의 수확이 적을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산농의 농사짓기가 유리할 것으로 여겼다.

산농들은 이겼다고 하여 술과 음식을 내서 즐긴다.

돌팔매질하는 따위로 벌이는 동전(洞戰)과는 달리 친목을 도모하는 터가 되었다.

이와 달리 윷가락을 던져서 주역의 괘를 뽑아 신상에 관련된 일을 점치는 방법이 있었다.

이 점은 셋의 수를 기본으로 한다.

윷을 던져 도는 1, 개는 2, 걸은 3, 윷과 모는 4로 정했다.

세 번 모두 도가 나오면 그 숫자는 111이 되며

도, 개, 걸이 나오면 123이 되며, 걸이 세번 나오면 333이 된다.

또 모가 세번 나오면 444가 된다.

주역은 점서로 활용되었는데 8괘를 제곱해서 64괘를 만든다.

이 64괘가 주역의 기본을 이루며 그 괘마다 내용이 적혀 있다.

그리하여 윷점에서도 64괘에 따라 64가지 사항을 설정하고 간단한 점사를 적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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