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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풍수

by 자연처럼 2012. 3. 22.

겨레풍수

 

 

1강. 땅위에 펼쳐놓은 하늘세계

 

2강. ?가비알풍수?의 바탕은 하늘

 

3강. ‘새터?의 가비알, 자미원

 

4강.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 사연

 

5강. 하늘사람의 길, ?머후리?

 

6강. 빛의 쉼터, 첨성대

1강. 땅위에 펼쳐놓은 하늘세계

좋은 땅이란

10승지란 이 나라 조선 땅에서 꼽을 수 있는 살기 좋은 땅 열 군데를 그렇게 부르는 말이다. 허나 일반적으로 10승지라 하면, 《정감록》(鄭鑑錄)에 실린 10곳을 가리키거나, 9세기의 불교승려이자 이름난 도참사상가인 도선(道詵)이 꼽았다고 입으로만 전해지는 10곳을 가리킨다.

따라서 보는 사람과 그 관점에 따라 10승지를 다르게 꼽을 수도 있다. 전쟁과 같은 세상의 어려움을 피하는 복지(福地)라는 기준으로 볼 때와 농사와 다른 생산이 잘 되는 곳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10승지는 틀림없이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잘 알려진 지리지 가운데 《택리지》(擇里志)가 있는데, 그 책은 양반들이 시골로 물러나 살기 좋은 땅을 승지로 꼽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땅을 좋은 땅으로 꼽을 수 있을까? 또 그렇게 꼽을 경우 어떤 곳이 꼽히게 될까? ?날마다 좋은 날이요 곳마다 좋은 땅?이라는 말처럼, 모든 땅은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좋고 나쁨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공구 선생은 ?공도가 지켜지고 있는 곳을 가려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고 할까?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함을 설파했다.

허나 그것은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 생각이 바른 사람은 바른 땅을 골라 살게 마련이고, 생각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바르지 않는 땅을 고르게 마련이니 말이다. 돈을 중시하는 사람은 돈벌이가 잘 될 곳을 저도 모르게 찾기 마련이고, 건강을 중시하는 사람은 저도 모르게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곳을 찾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고른 땅이 그런 조건에 잘 맞지 않더라도 그곳에서 자신의 관심사를 이루는 데 마음을 모은다. 그래서 결국 그곳이 그에게 알맞은 땅으로 되어버린다.

실제로 지난날 인심이 순박하기로 소문난 고을이 오늘날엔 인심이 사납기로 소문난 곳이 되어버린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날 예의가 바른 곳으로 이름난 땅이 이제는 염치 모르는 사람들의 소굴로 둔갑해버린 곳들도 없지 않다. 참으로 사람의 몫이 크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니다.

뿐만 아니다. 세상일이 모두 귀찮은 사람이 어찌 탁 트인 넓은 곳을 좋아할 리 있겠으며, 더불어 북적거리며 사는 게 좋은 사람이 새둥지 같은 정자 자리를 어찌 삶터라고 여길 리 있겠는가? 전쟁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방어가 어려운 곳을 좋은 곳이라 할 것이며, 가난이 지긋지긋한 사람이 어찌 물산 풍부한 곳을 싫어하랴?

 

땅과 사람의 어울림

그러나 땅은 사람에게 매인 것이 아니며, 사람보다 먼저 태어난 엄연한 생명체다. 이 말은 땅이 생명체가 아니라고 보면서 그 중요성 때문에 생명체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일부 사람들, 예를 들어 이론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또는 환경론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비유론과 다르다.

실제로 땅은 우리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가지고 신진대사를 하며, 사고를 하고,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가 선택하는 의지적인 생명체다. 비유하자면 사람의 뱃속에 들어 있는 벌레들이 사람을 환경으로 여길 뿐 어디 생명이라 하겠는가? 그러나 사람은 분명 그 벌레와 똑같은 차원의 생명체일 따름이다. 땅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들은 한편 땅에 기생하는 벌레이지만, 다른 한편 우리들과 똑같은 차원의 생명체일 따름이다.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 알맞지는 않겠지만 이 비유를 계속 이어가기로 하자. 우리의 뱃속에서 회충은 대장에 사는 것이 알맞다. 그렇지 않고 간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살려들면 저도 죽고 사람도 병들거나 죽는다. 땅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살아야 할 마땅한 곳이 있으며, 그곳에 살아야만 사람도 살고 땅도 살 수 있다. 그것이 어울림이요 또한 사람이 땅과 더불어 사는 길이다.

거꾸로 사람이 제 살 곳에 살지 않을 경우 이때부터 재앙이 시작된다. 온전한 모습으로 살 수 없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물론 땅도 마찬가지로 앓게 된다. 또 사람이 제대로 골라 살지 않으면서 그곳을 마음대로 살만한 곳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여서 사람이나 땅에게는 모두 불행한 결과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기운이 움직이는 길이 있고, 그 뼈대가 있으며, 그 피흐름이 있다. 또 살이 있고, 털이 있으며, 위장이나 허파 같은 기관이 있다. 다만 그 생김새나 구조가 우리의 몸과 달라서 포유류의 몸껍질에 갇힌 우리들의 생각으론 쉽게 알 수 없을 따름이다.

우리는 우리와 땅이 가진 공통점에서 느끼고 보고 생각할 때만 비로소 땅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신(神)과 기(氣)다. 그러므로 땅을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스스로의 신을 세워야 하고 스스로의 기를 으뜸가는 감각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겨레 고유의 지리관, 곧 ?가비알?이다.

 

다시 천문지리로

땅도 마찬가지여서 하늘의 뱃속에 널린 기생충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땅 지구는 수많은 하늘의 다른 땅들과 형제 같은 어울림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 그런 땅들을 수많은 가족들로 나누어볼 수도 있다. 하늘에서 나(라, 星)란 그런 땅의 이름이며, 자리(구리, 宿)는 그 가족의 이름이고, 별(바라, 辰)은 그 가족의 중심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즉 지구라는 ?나?는 태양이라는 ?별?을 중심으로 하는 태양의 ?자리?인 것이다.

물론 이런 가족들 가운데도 다시 중심이 있고 또 중심의 중심이 있다. 모든 사상이 마찬가지이지만, 우리 겨레 고유의 ?가비알?은 이런 관계를 크게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3개의 단계로 구분했고, 보다 엄밀하게는 12개의 단계로 나누었으며, 더 엄밀하게 나누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므로 지리는 곧 천문이자 인문이기도 했다. 천문이나 인문을 모르고서 지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언제나 그러하듯이 속류가 있기 마련이어서 구질구질한 지리이론이 넘쳐흘렀고, 때로는 그런 것이 겨레 고유의 지리관인 것처럼 행세하기도 했다. 더구나 요즘에는 서양합리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쉬운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겨레 고유의 지리관을 보여주는 이론조차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도선의 지리관은 천문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 바탕은 간 곳이 없어지고 오늘날엔 간편한 실용적 응용법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이른바 명당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가비알?을 바로 알기 위해 ?천문지리?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또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소중한 보물을 찾게 되지나 않을까?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분명 그렇다.? 이제 우리는 차근차근 그 보물로 접근해갈 것이다.

 

 

우리 땅 이야기 1-풍기고을 금계

겨레 고유의 눈을 뜨지 못했더라도, 그리고 신을 세우고 기의 감각으로 보지 못할지라도, 이곳에서는 하늘과 땅이 어울려 서로 주고받는 것을 볼 수 있다. 금계라고 해서 그리 좁은 것은 아니어서, 이 지역의 모든 곳에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시원한 지하수가 샘물 되어 올라오는 곳 주위에는 늘 시원한 기운이 감돌지만, 물이 치솟는 곳은 좁은 한 곳인 것처럼 말이다.

이 곳은 하늘로 견주어 말하자면 이 나라 동쪽 땅, 요즘의 지리학적 용어로는 ?홍천지구대?의 동쪽 반편에서, 자미원의 남쪽 자리 이궁(離宮)과도 같은 곳이다. 하늘과 통하는 이곳의 기운은 금빛인데, 어느 자리에 서서 호흡을 고른다면 누구라도 이 기운을 눈으로조차 보고 느낄 수 있다. 몸이 저절로 튀어 오르는 환희의 느낌도 이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조들은 이런 곳에서 즐겁게 살기를 바랬다. 전쟁이나 피하고 말세나 피하자는 생각에서 이곳을 10승지의 으뜸으로 삼은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그곳에 스며든 사람들의 역사와 그 뒷 이야기는 모울도뷔의 몫이 아닐 듯 하다.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 그런 곳에서 함께 한다면, 그 아름다움을 키워내는 곳이 좋은 곳이다. 죽임이 아니라 살림, 갈라섬이 아니라 어울림이 넘치는 좋은 땅, 아직은 드러낼 수 없는 금계암 아래의 이곳을 시작으로 앞으로는 공개할 수 있는 좋은 땅을 소개하려고 할 따름이다.

2강. ?가비알풍수?의 바탕은 하늘

빛과 닷은 삶의 기둥과 들보

?먼저 삶과 죽음의 기둥과 들보를 보라, 모양 있고 모양 없는 것들이 모두 ?가운데?(中)로부터 피어난다?(始見死生之樞極 有相無相發於中)는 말이 있다. 삶의 이치를 이만큼 잘 밝히는 말도 드물 듯싶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 특히 선가의 전통수행을 했던 분들의 생각을 담고 있는 이 말에서 삶의 기둥과 들보는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할 수야 없을 테고, 어쩌면 말로는 옮겨내기조차 어렵겠지만, 여기에서는 그 가운데 한 가지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한다.

옛 분들은 모양 있는 것들과 모양 없는 모든 것들이 빛과 ?닷?의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보았다. 빛이라는 말이야 오늘날에도 그대로 쓰이고 있는 말이니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닷?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옳을 성싶다.

?닷?이라는 말을 어떻게 풀면 마땅할까? ?온도?나 ?온기?라는 자주 쓰이는 한자어로 옮기자니, 오늘날의 물리학적 상식으로 온도는 곧 ?열?과 같은 뜻이 되므로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말의 뿌리를 같이하면서 오늘날까지 쓰이는 다른 우리말을 살펴보는 것이 옳을 듯싶다.

?따뜻하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말도 온도와 직결되는 듯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말의 특성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따뜻한 마음?이나 ?따뜻한 이웃?에서 이 말은 결코 온도나 열과 직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 말을 굳이 한자어로 옮긴다면 ?생기?(生氣)나 ?화기?(和氣)쯤 될 것이다.

사람의 생기나 화기(和氣)와 관련이 깊은 한자어로서 사람의 몸을 설명하는 데 핵심적인 ?심포?(心包)라는 용어가 있는데, 심포를 가리키는 옛 우리말이 ?다쉬?인 것을 보아도 ?닷=생기, 화기?라는 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또 심포와 관련된 기운은 5행의 기운으로 보지 않고 오행 전체를 조절하는 별도의 기운으로 보는데, 이를 ?상화기?(相火氣)라고 하여 열을 가리키는(열에만 한정되지는 않지만) 화기(火氣)와 구분하고 있는 바, 이것을 바로 ?닷?이라고 보아도 큰 잘못은 없을 것이다. 다만 심포를 심장과 견주어 ?버금화기?(相火)니 ?으뜸화기?(君火)니 하며, 그리하여 相을 재상으로 여기는 속설을 따지지는 않으려 한다.

빛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말하는 빛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빛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빛은 이미 닷과 결합되어 있는 빛이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빛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양새를 갖춘 빛, 즉 ?빛깔?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 빛이란 어떤 구체성도 갖지 않는 그런 빛이다. 이른바 ?생명의 원초적인 빛?을 가리키는 셈이다.

아무튼 옛 분들은 이 두 가지가 모여 하나됨을 이루면 ?물건?이 된다고 여겼다. 우리의 삶도 예외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 두 가지가 모여서 하나됨을 이루면 그것이 곧 삶이고 갈라서서 모두 흩어지면 그것이 곧 죽음이라고 보았다. 물론 삶의 과정에서 이런 두 가지는 부분적으로 끊임없이 거듭되어 신진대사를 이룬다.

 

하늘은 빛, 땅은 닷

이런 관점은 ?사람이란 하늘과 땅이 하나되어 생겼다?는 겨레붙이들의 옛 이야기에서 그대로 드러나는데, 이때 하늘은 곧 빛이요 땅은 곧 닷이다. 즉 좁은 의미에서는 원초적인 빛을 일러 하늘이라 했고, 원초적인 닷을 일러 땅이라 했던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는 하늘이나 땅이라는 우리말의 음운론적 풀이를 마땅히 붙여야 하겠지만, 이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기회를 얻기로 하겠다.

다만 여기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늘과 땅도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빛과 닷의 결합체?라는 점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또 그 가운데 가장 바탕이 되는 결합체를 일러 ?하라?(태양)라고 불렀음을 이야기할 필요도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물건?이 하라의 자손이라고 여겼음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겨레 고유의 천문지리관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인들은 그래서 ?하라?를 중심으로 작은 하라들을 설정했고, 이 작은 하라들을 중심으로 다시 더 작은 하라들을 설정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의 땅도 하나의 하라로 설정되었으며, 우리들의 몸도 하나의 하라, 즉 ?이하라?로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사람이 곧 하늘?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면 자신을 알 수 있다는 요즘 유전학의 섣부른 주장처럼, 우리의 선인들도 지구라는 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하늘?(일반적인 의미에서)을 이해하려고 했다. 우리의 문화에서 천문관과 지리관이 별도의 갈래이면서 서로 맞물려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천문을 알아야 지리를 알 수 있다?는 말의 뜻도 여기에 있다.

 

?바투하라?와 ?바터?

그래서 이번에는 매우 간단하게나마 우리의 천문관과 관련하여 땅 이야기를 늘어놓게 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일상적인 의미의 하늘을 이해하기 위해 태초의 하라, 즉 가장 중심이 되는 하라를 설정했다. 그것이 바로 ?바탕별?이라는 뜻의 ?바투하라?인데, 사실 바탕별은 바투하라가 음운변화를 겪어서 생긴 말이기도 하다.

바투하라는 한자어로 ?극성?(極星)이나 ?북신?(北辰) 등으로 옮겨지는데, 옛 만주어로는 이를 ?바투 우시하?라고 불렀다. 이때 ?우시하?는 별을 가리키는 말로서 ?우시?는 ?위?를 가리키고, ?하?는 ?처음?을 가리키므로, ?우리 위에 있으며 우리 보다 먼저인 것?이 된다. 만주어에서는 ?바투 우시하?를 ?하안 우시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하안?이 ?으뜸?이라는 뜻이므로 바탕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우리 선인들은 이를 중심으로 ?나난구리?(북두칠성), ?비키타라?(벽성) 등 중요한 별자리를 설정했다. 그리고 이 별자리들은 보다 좁은 차원에서 다시 ?바탕별?로 설정되었다. 이처럼 울타리가 차츰 좁아져서 우리의 땅으로 가까워지면서 마침내 하늘은 땅으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땅에서 설정된 ?하라?가 바로 ?바터?(밭, 바탕이 되는 터)였다.

물론 ?바터?는 뒷날에 이르러 인문지리학적으로 쓰이면서 그 뜻이 보다 넓어지고 때로는 의미가 바뀌기도 했다. 즉 사람이 농업을 중시하면서 여름짓기(농사, 옛말은 ?여름디이?)의 터전이 우리 생활의 바탕이라 여기게 되자, 그것을 ?바터?(田, 밭)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터?의 원래 뜻을 짐작케 하는 쓰임새도 아직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농사지을 땅이라곤 한 뙈기조차 없는 두메에 붙여진 땅이름들 가운데도 ?밭?이 꽤 있다. 예를 들어 ?달밭?(달밭골)이나 ?새밭?(쇠바터 또는 쇠바들) 등이 있다.

우리 겨레의 지리관은 이처럼 ?바터?를 설정하는 데서부터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뫼와 가람을 이해하고, 사람의 터전을 살필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터?를 중심으로 자신의 터전을 살피고 나면, 다음에는 그 터전 안에서 다시 더 작은 ?바터?를 설정했는데, 그것을 일러 ?가비알?(가운데의 가운데, 즉 알자리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즉 우리 겨레의 풍수는 ?바터풍수?나 ?가비알풍수?인 것이다.

 

도선풍수도 가비알풍수

이런 눈을 갖지 않으면, 이른바 ?도선(道詵)풍수?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를 위해 잠시 도선풍수에 등장하는 중요한 용어를 살펴보면서 이를 가비알풍수와 견주어보기로 하자.

도선풍수에는 우선 바람이 아늑하게 머물러야 한다는 장풍(藏風)론과 물길을 얻어야 한다는 득수(得水)론이 있다. 그런데 장풍론은 ?가비알?이 ?바터?와 연결되는 ?가비알?의 힘 즉 자체 동력을 확인하는 이론이다. 또 득수론은 ?바터?를 중심으로 하는 ?가비알?의 운행궤도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그러므로 득수를 현대인문지리학의 관점에서 대외연결로 확보 등으로 이해하면 도선풍수의 본질을 제대로 못 보는 셈이 된다.

다음으로 ?가비알?의 자태를 설명하는 형국(形局)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것은 하늘에 있는 하라와 가비알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도선풍수의 좌향(坐向)은 가비알의 내부 운행에서 그 축(軸)을 이해하는 이론이다. 먼 산에서부터 그 가비알에 이르는 흐름을 읽는 간룡(看龍)이란 이론도 있는데, 그것은 그 가비알의 소속을 설명하고 있는 이론이다.

그러므로 이를 살피지 않을 경우, 우리는 도선풍수에서 바터나 가비알을 찾는 이런저런 기술만 배우게 될 따름이며, 우리 고유의 지리관은 다른 많은 것들처럼 우리의 생각에서 뒷전으로 숨어들게 된다.

 

왜 백두산인가

그렇다면 옛 분들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한국의 땅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결론은 잘 알려진 대로다. 우리의 한국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그 반지름이 일본 열도를 살짝 지나가는 둥글고 거대한 하나의 ?바터?였다. 그래서 백두산은 우리 겨레에겐 신성한 산일 수밖에 없었고, 그 세계 안에서 살고 있던 다른 종족들에게도 신성한 산이었다. 근래의 만주족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날의 말갈이나 여진족이 백두산을 함께 존중했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튼 이 큰 뫼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바터?는 다시 몇개의 작은 흐름들과 작은 ?바터?들, 일반적으로는 여덟 개의 ?바터?들이 설정되었다. 오늘날의 우리 땅(남한과 북한을 통털어)도 그 작은 ?바터?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름하여 한자어로는 ?진괴?(震塊), 옛 우리말로는 ?오롤터?(?오라? 또는 오로터, 오른 터의 뜻)라 불렸다. 이 ?바터?는 백두산에서부터 그 끝이 일본 열도에 이른다.

이 ?작은 바터?인 우리들의 땅도 물론 나름대로 또 여덟 개의 작은 ?바터?들로 구성되었으며, 이 작은 세계는 다시 더 작은 세계로 나뉘어졌다. 그렇지만 앞으로 당분간 우리들의 이야기는 바로 ?진괴?라는 ?바터?에 머무를 것이다.

남한과 북한을 모두 포함하는 오늘날의 한국 땅도 이처럼 그 나름의 세계라면, 그 ?바터?의 ?가비알?은 어디쯤일까? 실제로 우리 선인들이 이 세계를 일찍이 이해하고 있었다면, 그곳은 마땅히 우리 ?바터?의 ?가비알?에 어울리는 그런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또 그곳을 중심으로 땅에까지 내려온 하늘세계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허나 여기에서는 먼저 그 곳을 찾아가는 것으로서,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다음 기회에 이야기를 이어 가려고 한다.

 

이 땅의 으뜸 ?바터?는 ?하늘곶이?

이곳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양해를 얻으려고 한다. 구체적으로 장소를 밝히려던 첫 호의 약속과는 달리,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해서 그곳의 오늘날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곳은 무덤자리나 사람의 일상적인 삶터가 되기 어렵고, 굳이 사람이 살려고 하더라도 그곳과 어울리지 않는 몸을 가진 사람들이 거기에 살게 되면 그 지나친 힘에 시달리기만 하겠지만, 어디 사람들의 욕심이 그런 상식을 지키기만 할 것인지? 아무튼 이 글에서 쓰고 있는 그곳의 이름 가운데 하나는 그 옛 이름으로서 이 곳 말고도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 더러 있으며, 다른 하나는 오늘날의 한자어 이름과 우리말 이름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뜻만 살려서 임의대로 고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불뮈골?이라 불리기도 했고, 뜻을 풀이하여 ?하늘곶이?로도 부를 수 있는 이곳은 오늘날의 지역구분으로 충청북도에 속한다. 이곳은 소백의 흐름과 만나 회돌이를 치는 짝이 되는 곳이며, 속리산의 정상과 시각적으로 대칭을 이루어 마치 두 곳이 천칭을 이루는 듯한 곳이다.

그곳에 서면 중심이 잘 잡힌 거대한 접시를 타고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니 그 거대한 접시는 그대로 있는데, 그 접시 밖의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망울은 사라지고 눈만 남은 오늘날의 감각일지라도 그것을 느끼고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실제로 이곳은 위도로도 꽤 올라와 있고, 해발로도 꽤 높은 곳이지만 서리조차 거의 내리지 않는다. 물론 그 바터 가운데서도 ?가비알? 자리에는 전혀 서리가 내리지 않는다. ?불뮈?라는 이름도 그렇다. 그것은 바로 ?하라뫼?(天山)가 음운변화를 겪어서 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불?은 ?하라?의 음운변화형이고, ?뮈?는 ?뫼?를 읽는 그 지역의 음가인 것이다.

아무튼 이제 다음부터는 이곳으로부터 우리들의 땅을 살펴간다. 아울러 우리들의 하늘까지도!

3강. ‘새터?의 가비알, 자미원

좌향과 방위는 다르다

옛 분들은 방향(방위와 좌향)을 일컬을 때, 동서남북 말고도 여러 가지 용어를 썼다. ?패철?이라 불리는 지남판(指南板)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10간 12지를 방향표시어로 썼으며, 건․곤․간․손(乾坤艮巽) 따위의 괘(卦)이름도 방향표시어로 썼다. 게다가 ?높?이나 ?새?나 ?하?나 ?뉘?나 ?마? 따위의 우리말로도 방향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 용어들의 쓰임새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방위(方位)와 좌향(坐向)의 개념을 나누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좌향은 직선적인 방향 개념으로서 오늘날 우리들의 개념과 비슷하다. 이에 견주어 방위는 흐름을 가리키는 개념으로서, 우리 특유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무덤이나 집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면, 이를 일러 ?자좌오향?(子坐午向)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떤 지점(地點)과 다른 어떤 지점을 잇는 직선적인 좌향 개념을 담는 말이다.

이에 견주어 어떤 산의 방위를 이야기할 때는 어떤 지점과 다른 어떤 지점을 잇는 줄이 직선이 아닐 수도 있다. 방위 개념에서 문제는 흐름이다. 따라서 방위는 어떤 곳의 흐름이나 소속을 나타낼 때 자주 썼는데, 그 개념을 여기서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강화도 마리산 꼭대기에는 왕검(王儉)의 맏아들 부루(夫婁)가 세웠다고 하는 ?참성단?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 참성단이 백두산과 연결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곳에다 패철을 놓아보면 좌향이 백두산과 무관한 방향으로 나오고, 이로 말미암아 헷갈려하거나 실망하기도 한다.

그런데 좌향 개념이 아닌 방위 개념으로 따져보면 참성단은 분명 백두산을 바라보고 있다. 즉 참성단이 있는 곳과 백두산을 직선으로 이어놓고 참성단의 좌향을 따져보면 그것은 백두산을 바라보지 않고 있지만, 참성단의 방향을 따라 그 흐름을 쫓아가보면 백두산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등장하는 방향 개념을 읽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방위 개념을 알아야 한다. 어떤 지역을 다섯 개의 방(方)으로 나누었다고 할 때, 예를 들어 백제의 5방 가운데 남방이 있는 곳이 좌향으로는 남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괘의 이름을 빌어 방향을 표시할 경우, 그런 점에 더욱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각 괘에는 독특한 성격이 있고, 그 괘를 상징하는 지역은 그 방향성보다 그 성격을 보다 잘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보다 협소한 지역을 살필수록 더욱 더 그렇다.

 

?새터?의 ?가비알?

아라가비 님이 지난 호에서 살피신 이 땅의 복판 ?하늘곶이?는 그 모양이 마치 종이로 접은 바람개비와 같다. 바람개비에는 네 개의 날개가 있는데, 각 날개는 다시 두 개의 날개로 나뉘어진다. 그 가운데 북쪽으로 난 바람개비를 쫓아가면 마침내 하늘곶이와 비슷한 날개를 가진 어떤 ?바터?에 이르게 된다. 그곳이 바로 강원도 사북과 고한 가까이에 있는 자미원이다.

그러나 자미원이 있는 땅 특히 이궁의 자리가 있는 곳은 하늘곶이에서 바라볼 때 동쪽에 있지 북쪽에 있지 않다. 즉 하늘곶이에서 바라볼 때 자미원 땅덩어리는 동쪽에 있지만, 그것을 찾아가려면 먼저 북쪽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태백산맥을 넘어 불어오는 북동풍을 일러 높새바람이라고 한다. 즉 ?높새?와 북동은 서로 통하고 있다. 실제로도 북쪽을 일러 ?높?이라 하고, 동쪽을 일러 ?새?라고 한다. 그래서 하늘곶이에서 바라보는 자미원의 땅은 새쪽의 터전이며, 자미원은 그 터전의 알자리인 ?가비알?이다.

이 가비알이 있는 바터는 동쪽이라는 방향과 마찬가지로 그 성격에서도 ?진괴?(震塊)인데, 하늘곶이를 중심으로 하는 우리 땅 전체가 보다 큰 ?진괴?(새터)이기도 하므로, 이곳이야말로 우리 땅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자미원 가비알의 풍경

자미원은 사북과 고한에 가까운 탄광지대(지금은 폐광지대)인데, 태백선 열차가 지나가는 작은 기차역도 있다. 그 역의 이름도 자미원이다. 광산지대가 아니었으면 기차역이 들어서지도 않았을 법한 너무나 작은 기차역이다. 그 기차역의 앞산이 바로 자미원의 알자리가 있는 곳으로서, 역의 뒷산과 연결된 낮은 산목 아래로 굴이 뚫리고 있었다.

그런데 자미원의 알자리가 있는 산에는 돌이 없다. 아니 큰돌이 없다. 작은 돌만 여기저기 조금씩 널려 있다. 그곳을 처음 찾았을 때는 봄이 한창이었는데, 돌도 없는 산이라서 두릅과 같은 산나물들이 지천이었다. 그런 풍경을 살피면서 그 산의 꼭대기 가까운 곳까지 올라갔다. 자미원이라는 이름의 가비알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이곳은 이른바 ?봉황부조형?(鳳凰俯朝形), 곧 봉황이 날아내려 오면서 인사를 드리는 형국인데, 봉황의 뒤를 흐름 따라 쫓아가면 거꾸로 ?하늘곶이?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중심인 가비알은 봉황의 부리 위 양미간 사이가 되는데, 반대편에서 바라보면 그런 자태가 더욱 뚜렷해 보인다. 굴이 뚫리고 있는 산목이 이 봉황의 바른쪽 날개 부분이라고 보면 더욱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그 가비알에는 그래도 꽤 큰 바위들이 있는데, 크다고 하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큰 것은 아니다. 그 바위를 중심으로 삼아 이리저리 둘러보면, 앞뒤와 양쪽 옆으로 돌무더기가 마치 인위적인 질서를 갖춘 듯이 자리잡고 있다. 앞의 바위 하나가 이 자리의 기준점이고, 양쪽 옆에 있는 돌무더기가 그 자리의 테두리였다.

그런데 그 자리의 안은 매우 독특했다. 모든 것이 그 자리의 밖과 달랐다. 흙도 바닥과 달리 완전히 검은 빛깔이었다. 그곳만 벗어나면, 흙이 대부분 누른 빛깔을 띠고 있었다.

 

모든 곳을 비워주는 곳

아라가비 님께서는 그곳이 온갖 기운을 비워주는 곳, ?무?(無)와 가까운 상태를 만들어주는 곳, 욕망을 비롯한 모든 부질없는 생각을 말끔히 없애주는 곳이라고 하셨다. 오래 있으면 원기(元氣)만 남고 다른 모든 기운이 거의 비워지는 곳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오래 있으면, 자신이 타고났던 원래의 기운을 되찾아가면서, 자기가 닦아왔던 것들을 되짚어서 되돌아가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알자리로는 어떤 생명체도 접근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자리에 머무는 그리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 화창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런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 새가 한 마리 날아다녔는데, 그물이라도 쳐놓은 것처럼 그 자리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고 빙빙 돌기만 했다.

그 안에서 반시간 가량 머물렀더니, 마치 뜨거운 물에서 오랜 시간 목욕을 하고 나왔을 때처럼, 손바닥에는 주름이 지고 잔손금도 매우 많아졌다. 또 이런저런 생각이 멈춘 채 매우 편안했다. 그래서 매우 편안하다고 했더니, 이런 곳에는 ?도량(道場)이 있더라도 몸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은 오래 머물 수 없다?고 하셨다. 실제로 원기만 남기는 곳에 몸공부를 하지 않은 분이 오래 머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자미원은 어디로 흐르는가

자미원의 가비알은 다시 여덟 갈래로 갈라진다. 뒤쪽으로 봉황의 꽁무니라 할 수 있는 곳에서 두 개의 흐름이 갈라져 나가고, 그 옆으로 봉황의 발이라 할 수 있는 곳에서 또 두 개의 흐름이 갈려 나간다. 그리고 봉황의 두 날개라 할 수 있는 곳에서도 각각 두 개의 흐름이 갈라져 나감으로써, 자미원은 자미원답게도 팔괘(八卦)의 모양새를 두루 갖추었다. 물론 그 여덟 갈래의 흐름은 각각 하나의 점과 이어지는데, 그 점은 다시 그 바터의 가비알이 된다.

먼저 바른쪽 날개로부터 갈라진 두 흐름을 따라가면, 하나는 정선의 아우라지 가까운 곳에서 작은 중심점과 만나게 되고, 다른 하나는 오대산의 두로봉 부근에서 작은 중심점과 만나게 된다.

두 번째로 왼쪽 날개에서부터 갈라진 두 흐름을 따라가면, 하나는 봉평 북쪽에 있는 회령봉 기슭에서 작은 가비알과 만나게 되고, 다른 하나는 치악산 뒷편 수래너미 부근에서 작은 가비알과 만나게 된다.

세 번째로 봉황의 다리에서부터 갈라진 두 흐름을 쫓아가면, 왼쪽 다리에 해당되는 흐름은 영월의 사자산 가슭에서 작은 가비알과 만나게 되고, 바른쪽 다리에 해당되는 흐름은 태백 어귀의 독상암(禿翔巖) 밑에 있는 작은 가비알과 만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봉황의 꽁지 부분에서 갈라져 나간 한 흐름는 구룡산 자락의 우구산(牛口山) 기슭에서 작은 가비알을 이루고, 다른 한 흐름은 풍기의 금계 뒷 기슭에서 작은 가비알을 이루는데, 이 마지막 작은 가비알은 이괘(卦)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자미원을 중심으로 하는 바터가 하늘곶이와 연결되는 중요한 통로가 되기도 하는 셈이다.

 

가비알의 성격이 다르면

가비알의 성격이 다르면 느낌도 다르다. 예를 들어 이궁(宮)이 되는 곳에서는 하늘곶이와의 연결로 말미암은 ?기운의 축복?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그곳에서는 일정한 시간마다 금빛 기운이 내린다. 또 감궁(坎宮)이 되는 우구산 기슭에서는 땅으로부터 기운이 솟아올라 사람의 몸마저 뛰놀게 한다. 건궁(乾宮)이 되는 태백 어귀에서는 그 어떤 곳보다 강한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는데, 돌이나 풀마저 살아 움직이는 것을 평범한 눈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몸을 달구어본 경험이 있는 이가 이런 가비알을 달굼의 터전으로 삼는다면, 그 공부도 분명 크게 진보를 이룰 것이다. 참으로 옛 화랑들의 산천 유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아번에는 아라가비 님과 함께 다녀보았던 ?새의 터전?을 살펴보았다. 특히 그 가비알인 자미원을 중심으로 아주 간략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아 보았다.

이제 다음부터는 당분간 자미원과 같은 차원의 가비알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물론 이번에는 제대로 다루지 못한 하늘이야기도 함께 말이다.

4강.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 사연

왜 하늘을 살폈던가

?사람이 하늘을 쳐다보고 산 것은 언제부터일까??

참 어리석은 질문이다. 허나 이 질문에는 다른 뜻이 담겨 있다. 어떤 뜻인가? 아무래도 질문을 조금 바꿔야겠다.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늘을 살펴본 것은 언제부터일까??

이렇게 바꾸고 나니, 그만 어리석은 질문이 어려운 질문으로 바뀌고 말았다. 왜냐하면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뜻 없이 그냥 하늘을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늘을 쳐다보고 제멋에 겨워 시를 읊기도 하고, 하늘을 쳐다보며 고마움과 아쉬움을 달래기도 하지만, 어디 그것이 하늘을 제대로 쳐다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늘을 쳐다본다는 것은 하늘을 살핀다는 것! 하늘을 살폈던 까닭은 아무래도 사람에게서 찾아야 할 듯싶다. 그렇다고 ?농사를 짓는 데 도움이 되게 하려고?라는 따위의 대답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하늘을 쳐다보는 것은 거울을 쳐다보는 것과 그 뜻이 같다. 하늘을 봄으로써 제 자신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은 사람의 거울인 것이다. 거울이 무엇인가의 겉모습을 비추는 것이듯, 하늘도 사람의 무엇인가를 비추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비추려는 것이 겉모습이 아님은 넉넉히 짐작할 것이다.

그런데 이 거울은 간단하지가 않다. 겉모습을 비추는 거울처럼 불투명하지도 않으며, 그것처럼 빛깔을 반사하지도 않고, 그것처럼 말끔한 것도 아니며, 평면은 더구나 아니다. 하늘이라는 거울은 투명할 뿐 아니라 별이라고 하는 물질과 그 비슷한 물질들로 꽉 차 있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이 하늘에서 비춰보려 한 것은 거울에서 비춰보려 한 것과 사뭇 달랐을 것임을.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비출 수 있었을까?

 

우러러 보며 그리는 앙관천문도

우리는 가끔 우주에 널려 있는 수많은 별들 가운데 생명체가 있을 만한 별을 생각하기도 한다. 허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생명체가 있는 별?이 아니라, ?지구적 생명체가 있는 별?을 생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늘을 그린 그림을 일러 보통 ?천문도?라고 부른다. 허나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앙관천문도?(仰觀天文圖) 즉 ?위로 쳐다보고 하늘을 그린 그림?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동양에는 앙관천문도만 있는 게 아닌 탓이다. 동양에는 앙관천문도말고도 이런저런 천문도가 있다. ?부찰천문도?(俯察天文圖)와 ?중조천문도?(中照天文圖)가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올려다본 천문도도 있고, 내려다본 천문도도 있으며, 가운데서 비춰본 천문도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분도 부찰천문도나 중조천문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왜냐? 그 이름을 조금 바꿔서 불렀기 때문이다. 부찰천문도는 ?부찰지리도?를 바꿔서 부른 말이고, 중조천문도는 ?중조인체도?를 바꿔서 부른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소린가? 동양에서는 지리와 인체도 천문과 동일한 차원에서 그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리나 인체라는 개념이 동양에서는 하늘이라는 개념의 특수한 여러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그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천문도는 앙관천문도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그 가운데 하나는 먼저 앙관천문도를 그려야만 다른 천문도 즉 부찰지리도나 중조인체도를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여러 차원의 천문 가운데 가장 완벽하고 원초적인 천문이 되는 것이 앙관천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굽어보며 그리는 부찰지리도

부찰지리도(俯察地理圖)는 땅으로 내려온 하늘을 그린 그림이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상한 풍수론과 이상한 지리론이 나온다. 즉 땅이 곧 하늘이라는 것만 알고 앙관천문에 따라 그대로 땅을 살피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땅의 천문은 하늘의 천문과 어떻게 다를까? 아니 그것을 어떻게 그렸을까?

생각보다 쉽다. 앙관천문도에는 중심점이 있는데, 그것을 극성(極星)이라고 부른다. 우리말로는 ?바탕별?(바투하라)이라 부르는데, 이른바 ?북신?(北辰)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중심으로 북두칠성 즉 우리말로 ?나난구리?가 돌아가는 궤도가 있는데, 이 궤도의 내부 영역을 일러 자미원(紫薇垣)이라 부른다.

또 하늘에는 태양이 지나가는 길인 ?황도?와 달이 지나가는 길인 ?백도?가 있는데, 이 두 궤도는 거의 비슷하다. 천문도에서 지저분하게 낙서하듯이 달걀 모양으로 둥글게 그려놓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제 황도를 중심으로 다시 28개의 별자리를 설정했다. 그것이 이른바 28수(宿)다. 이것은 나난구리의 일곱별과 각각 1:4로 이어지는데, 시계방향으로 그려진 각․항․저․방․심․미․기의 동쪽 7자리, 두․우․여․허․위․실․벽의 북쪽 7자리, 규․루․위․묘․필․자․삼의 서쪽 7자리, 정․귀․유․성․장․익․진의 남쪽 7자리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밖에도 앙관천문도에 그려진 별은 많다. 황도 안에도 많은 별이 그려져 있고, 그 궤도 밖에도 많은 별이 그려져 있다. 또 그 별들에는 각각 우리말 이름이 있다.

아무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탕별이다. 이제 우리는 바탕별의 뒤로 가서 우리의 땅 지구를 살펴보아야 할 차례다. 그러면 지구는 보이지도 않는 작은 별이 되고 말 것이다. 허나 우리의 땅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젖줄이나 다름없지 않는가?

그래서 마침내 우리의 땅 지구를 엄청나게 확대하기로 했다. 바탕별 뒤에서 보이는 그 넓은 우주의 크기만큼 우리의 땅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우리의 땅은 마침내 바탕별과 지구 사이에 있는 모든 별을 담아낼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화폭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화폭에 별들이 하나하나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부찰지리도다. 그래서 부찰지리도도 사실상 천문도인 것이다. 다만 하늘은 이제 우리의 땅으로 내려왔을 따름이다.

그런데 하늘을 지구 위에다 옮겨 그리자, 그림이 많이 바뀌었다. 나난구리가 돌아가는 방향도 시계 방향에서 시계반대방향으로 바뀌었고, 28수의 자리도 시계반대방향으로 그려졌다. 동쪽과 서쪽도 물론 바뀌었다. 우리의 가비알풍수는 앙관천문도가 아니라 바로 이런 하늘그림 즉 ?부찰천문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혼동되면 ?엿쟁이풍수?가 나오게 된다.

 

놀라운 하늘 그림, 중조인체도

그렇다면 중조인체도(中照人體圖)가 무엇인지는 웬만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짐작한 그대로다.

중조인체도를 그리려면 이제 관찰자는 앙관천문도에 그려진 우주 밖으로 나가야 한다. 거기에서 바탕별과 지구를 각각 상단과 하단으로 보고 그 가운데 사람을 세운 다음 눈높이를 사람에게 맞추기만 하면 된다. 하나 더, 사람을 웬만큼 투명한 물체로 간주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람도 지구만큼 크게 확대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거대하게 확대된 지구를 다 덮을 만큼 확대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 어떤 별도 사람을 거친 다음에야 지구라는 화폭에 그려질 수 있다. 거꾸로 지구에서는 이제 사람이라는 거대한 물체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하늘을 관찰할 수 없게 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동양의 인체도이며, 따라서 이 인체도는 조금 변형된 천문도로서, 동양의 인간론은 이 천문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만 똑 같은 천문을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그려낸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 중조인체도를 그리려는 순간, 몇가지 문제가 생겼다.

먼저 바탕별과 지구 사이에 사람을 놓되, 어떻게 놓아야 할 것인지가 문제되었다. 아무튼 결론은 사람은 세워놓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나왔다.

다음으로 사람을 세워놓되 어느 방향으로 세워놓느냐가 문제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결론도 나왔다. 사람은 북쪽을 향해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이제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지구에서 올려다본 하늘이나 바탕별 뒤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모두 평면처럼 가정하면 되지만, 사람의 몸은 평면으로 가정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지적된 것이다.

그래서 지구로 내려오는 별이 사람이라는 공간체의 어디에서 머무르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까 하는 문제가 나오게 된 것이다. 즉 배에 머무는 것으로 보아야 할지, 가슴에 머무는 것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머리나 팔다리에 머무는 것으로 보아야 할지가 문제된 것이다.

어렵지만 이 문제도 마침내 풀렸다. 그 결과 어떤 별은 배에 머물게 되었고, 어떤 별은 가슴이나 머리 등에 머물게 되었으며, 어떤 별들은 팔이나 다리에 머물게 되었다. 물론 배 가운데서도 어떤 별은 좀 높은 곳에 그려지고 어떤 별은 좀 낮은 곳에 그려지게 되었으며, 사람 몸의 다른 부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역법으로부터 비롯된 이론들

그런데 그 해답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중요한 이론이 나왔다. 이른바 역법의 이론이다. 각각의 별을 사람 몸에 대응시키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대응의 원칙을 설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괘(卦)를 중심으로 하는 이론체계와 3재(才)를 중심으로 하는 이론체계다. 그리고 5행과 관련된 이론체계도 이 과정에서 나오게 되었다.

먼저 사람의 몸을 세 개의 덩어리로 나누었다. 하늘의 영역에 속하는 덩어리와 땅의 영역에 속하는 덩어리 및 사람 고유의 영역에 속하는 덩어리로 나눈 것이다. 그리고 이 영역의 분화를 통해 ?삼재합일?(三才合一)의 생명사상을 내놓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하늘의 별들도 세 개의 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세 개의 부류 안에서도 그 나름대로 운영원리가 적용될 것이라는 가설 아래, 하늘세계의 운영원리를 설정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8괘의 체계다.

그런데 세 개의 영역에 적용되는 8괘의 체계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8괘의 체계도 3개가 되었다. 이른바 천역괘(天易卦)와 지역괘(地易卦)와 인역괘(人易卦)의 체계가 나오게 된 것이다.

하도(河圖) 또는 복희(伏羲)팔괘를 천역괘라 하고, 문왕(文王)팔괘 또는 낙서(洛書)를 지역괘라 하며, 인역괘도 따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지역괘 안에 다섯 층의 운행궤도가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5행이론이 나오게 되었다. 또 5행 궤도를 통해 8괘가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 황도와 백도의 교차점과 일치하는 12개의 서로 다른 마디도 설정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사람 몸에서 12경락체계를 세우게 되었다.

 

다시 태어나는 하늘과 땅

이렇게 되자, 하늘과 땅도 다시 보이게 되었다. 중조인체도를 그리는 과정에서 적용된 이론들이 이제 하늘과 땅을 살피는 데서 그대로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하늘을 살필 때도 8괘의 이론이 적용되고, 땅을 살피는 데도 같은 이론이 적용되며, 5행이론이나 12마디의 이론도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은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가비알풍수?는 바로 그렇게 다시 태어난 하늘과 땅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앞으로 우리가 이 마당에서 나누게 될 이야기도 바로 그런 것이다.

아니 우리 닦음도 사실은 그런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런 이론에 따라 실천을 했던 소중한 경험들이 쌓인 것이다.

아무튼 신사년의 첫머리를 열면서, 우리 땅을 살펴 가는 기둥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왜? 이런 이야기를 덕담인양 나눔으로써 너와 내가 모두 하늘임을 거듭 되새기고자 함이다.

5강. 하늘사람의 길, ?머후리?

벼리글을 이어가며

이번 호 벼리글에서는 하나됨과 어울림을 추구하는 총체적인 생활양식인 예(禮)를 이야기했다. 천문지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하늘을 헤아리고 땅을 읽으며 사람을 보는 우리들의 공부도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됨을 이루기 위한 것, 따라서 천문지리도 결국은 하나의 예이며 예를 이루기 위한 앎의 바탕일 따름이다.

유학의 기본 경전인 《대학》(大學)의 벼리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큰배움에서 길(道)이란 밝은 것을 밝히는 것이요, 키움(德)이란 늘 새로워지는 것이요, 공동체로서의 사람(民)이란 더없이 바람직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大學之道 在明明, 德在新, 民在止於至善).

쉽게 말하자면, 밝은 길은 우리의 의식을 떠나 있으며 의식작용으로는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우주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진실은 우리들 삶의 방향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 진실의 일부분이며, 우리의 삶이 그것을 벗어나지는 않는 탓이다.

그러므로 이 진실을 한마디로 한다면, 끝없는 나뉨과 변함없는 하나됨이 함께 있는 세계, 아니 나뉨과 하나됨의 어울림이 곧 그것이라고 하겠다. ?바탕은 하나지만 나뉨은 다양하다?(理一分殊)는 말이다.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대학》에서는 각 존재의 존재다움이 커져 가는 것이 새로움이라 했다. 또 사람으로서는 사람다움을 키우는 것이 바로 새로움일 것인데, 이같이 새로워지는 과정상의 상태를 ?덕?(德, 키움)이라 했다.

그렇다면 덕은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커 가는가? 그것을 키우는 것이 바로 예라고 하겠다. 하나됨을 추구하며 어울림을 이루는 삶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의 끊임없는 개선이 바로 예인 것이다. 요컨대 예는 다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하나됨을 추구하는 어울림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예를 통해 스스로의 본질을 이루어갈 수 있다. 그 예에 담긴 어울림이 우주적 하나됨과 최대한 일치하도록 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 삶의 목표가 될 것이니, 그것이 바로 《대학》에서 말하는 ?더없이 바람직한 상태?라고 하겠다.

 

예도 아니며 어울림도 아닌 것들

지난 호에서는 세 가지 차원의 천문을 이야기했다. 즉 앙관천문도와 부찰지리도와 중조인체도가 모두 천문이라고 했다. 또 그것들은 모두 사람의 참모습을 밝히기 위해 그려낸 것이라고 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이어나가 보자. 사람은 스스로를 밝혀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그 이치를 밝혀 하늘과 하나됨을 이루고 땅과 하나됨을 이루려고 할 따름이다. 또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먼저 어울림의 삶을 살려고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천문지리도 결국 어울림의 삶을 위한 하나의 예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 구체적인 우리 땅 이야기를 하다가 지난 호부터 천문지리를 원론의 관점에서 다시 쓰는 데는 몇 가지 까닭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좀 더 체계적으로 천문지리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천문지리를 동양 일반, 특히 중국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 문화의 관점에서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일까? 우리네의 구체적인 삶, 특히 수행과 관련된 현실의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수행을 돈벌이나 건강의 수단으로 삼아 널리 퍼뜨려온 사람들이 너무나도 엉뚱한, 즉 어울림과 하나됨이라는 예의 근본을 지나치게 가벼이 여기는 상황을 몰고 왔다. 수행이라는 것이 ?작은 나를 이기고 어울림으로 돌아가는 것?(克己復禮)이건만,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에 포섭되어 이기(利己)적인 삶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삶을 바르게 하는 것은 거의 말하지 않고, 잘못된 오늘날의 삶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것을 보완하는 도구를 개발했다고 자랑한다. 삶의 자세를 바꿀 것이 아니라 천문지리의 이치와 어울리는 건강도구를 쓰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런 도구를 팔면 돈이 되기 때문이다. 허나 삶의 자세를 고치라고 하면 눈총만 받고 삶이 고달프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 바르게 앉고 바르게 누우며 욕망을 버리는 마음가짐 대신에 수맥차단 도구가 집안을 채운다. 그것은 무엇의 대가인가? 우리가 스스로의 삶의 자세를 바로 잡는다면 길거리에서 밥을 얻어먹어야 하는 어려운 피붙이들에게 돌아갈 수도 있는 밥이 그 댓가이다. 그것을 가로채서 수행도구 판매업을 하는 돈벌레들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다. 돈벌레를 키우는 이도 돈벌레이니, 이러고서야 무슨 수행이며 무슨 어울림이란 말인가?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그냥 받은 것이니, 참으로 수행을 말한다면 모두 그냥 나누어 주라! 수행을 팔아서는 단 한푼도 받지 말 것이다. 그것이 어울림의 예에 마땅한 것이다.

아무튼 하늘과 땅을 이해하여 나의 삶을 그것과 하나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여 나의 삶을 편리하게 하려 든다면, 그것은 너무나 위험하기도 하다. 그래서 생각했다. 그런 어리석음이 어찌 사람됨을 거부하는 데서 나올 것인가? 다만 바르게 알지 못한 데서 생겨났을 따름이라고.

 

어울림의 또 다른 이름, ?머후리?

오늘날의 천문학에는 많은 도구들이 있다. 이런저런 망원경들이 있고, 거리와 빛의 강도를 측정하는 도구들도 많이 있다. 지리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지질을 분석하는 도구로부터 지층을 탐사하는 도구 등 너무나 많은 도구들이 있다.

그러면 옛 분들의 천문지리에서는 어떤 도구가 쓰였을까? 나름대로 중요한 도구들이 있었다. 천문대 격이라 할 수 있는 첨성대도 있었고, 땅의 좌향을 재는 도구들도 있었으며, 수맥을 알아내는 도구들도 있었다.

허나 가장 중요한 도구는 사람 자신의 몸이었다. 요컨대 우리 문화에서 천문지리는 바로 사람의 감각을 기준으로 하는 천문지리였던 것이다. 도구를 이용하더라도 사람의 감각을 보완하는 정도이지, 모든 것은 사람의 몸을 기준으로 측정되었다. 우리의 천문은 허블망원경으로 보는 섬세한 천문이 아니라 우리의 몸으로 보는 ?주관적? 천문인 것이다.

따라서 하늘과 땅의 관찰자인 사람은 먼저 관찰의 바탕이 되는 도구인 자신의 몸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렇게 몸을 가다듬어야만 올바른 관찰이 되고, 올바른 관찰을 통해서만 올바른 삶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몸을 가다듬을 것인가? 먼저 스스로를 하늘과 땅의 일부분으로 감각할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야 했다. 산과 들을 다니고 물을 바라보고 바람을 느끼고 비를 맞으며, 달을 느끼고 별을 헤아리는 것이 몸에 익어야 했다. 그런 다음에야 체계적으로 천문과 지리를 배웠다. 즉 논리적 이성으로 배우기에 앞서 몸으로 배워나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천문지리를 배우는 우리 고유의 방법이며, 그것이 천문지리를 배우는 어울림의 예이기도 했다. 그것을 일러 ?머후리?라고 불렀다. 머후리는 물흐름을 가리키는 ?머?와 바람을 가리키는 ?후리?가 붙은 말로서, 한자어로는 ?풍류?(風流)라고도 했다. 옛 신라 화랑들의 공부였던 풍류가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풍류란 산천으로 유람이나 다니는 것이라고 보는 오해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지난날 자신의 놀음을 풍류라고 우겨대던 겉멋 든 사람들이 그 말을 함부로 씀으로써 오해를 불러일으킨 측면도 없지는 않다.

지난 호부터 천문지리를 좀 체계적으로 밝히자니, 이처럼 그 관찰자의 문제를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천문지리는 관찰자로부터 비롯해서 관찰자로 되돌아오는 하나의 예, 즉 어울림의 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으로만 우리의 천문지리를 배우려는 분들은 자신을 다시 돌이키는 일부터 해야 한다. 어렵다면 나름대로 병행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천문지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울도뷔나 바나리의 답사도 그런 까닭에서 이루어지는 ?머후리?의 하나라고 해야겠다.

한 가지만 더 붙이자. ?머후리?를 나서는 이는 자유로움을 빼고는 어떠한 선입견과 목적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다만 하늘과 땅과 벗들에게 이끌려 갈 따름이다. 그것이 흐름이며, 땅위에서 그 흐름은 늘 물과 함께 한다. 마치 우리들의 혈구들이 아무런 더러움 없이 깨끗할 때에만 핏줄을 따라 잘 흐르는 것처럼.

 

기수화토(氣水火土)

천문지리의 관찰자는 ?머후리?를 하되, 모든 것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하늘이나 땅과의 어울림은 자신의 것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며, 그래야만 자기 속에 들어있는 하늘과 땅의 힘이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머후리?의 시작이며, 그 머후리를 통해 생명체의 내적 특성이 뚜렷하게 펼침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김?과 ?풀?이니, 한자로는 기(氣)다.

다음으로 머후리를 하는 이는 늘 흐름을 따라야 한다. 미리 줄을 긋고 가는 것은 머후리가 아니다. 그냥 나서는 것이다. 물을 따라 오르고 내린다. 그리하여 자연의 그 물흐름이 몸 안에서도 재현된다. 그것이 머후리의 펼침이며, 그 머후리를 통해 생명체는 마침내 어울림의 단초를 얻는다. 이것이 바로 ?멋?과 ?뭇?이니, 한자로는 수(水)다.

셋째로 머후리를 하는 이는 늘 돌이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반응해야 한다. 물 흐름을 따라 어울리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서 그것과 맞서는 힘을 찾아야 한다. 내리면 올리고 올리면 내림으로써, 참된 어울림을 찾아야 한다. 어울림은 맞서서 이루는 새로운 하나됨이지, 마냥 따르는 딸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머후리의 키움이며. 그 머후리를 통해 생명체는 어울림의 참된 주체로 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부름?과 ?불림?이니, 한자로는 화(火)다.

마지막으로 머후리를 하는 이는 자기의 내부와 외부에서 어울림의 힘을 펼쳐야 한다. 안과 밖은 비례하는 것, 안으로 펼친 만큼 밖으로 펼쳐지게 마련이지만, 그 방법은 서로 다르게 전해온다. 다만 좌방 머후리는 밖으로 펼쳐 안으로 흐르게 한다. 이것이 머후리의 이룸이며, 마침내 관찰자는 하늘과 땅을 마주보고 올바른 눈으로 그것을 관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함?과 ?일?이니, 한자로는 토(土)다.

이것이 우리들의 천문지리다. 우리들의 천문지리는 이성의 굴레에 갇힌 초라한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예요, 어울림의 완성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참된 ?멋?이다.

6강. 빛의 쉼터, 첨성대

동양의 천문관

경주의 옛 궁성인 월성(月城) 서북쪽에는 신라 제 27대 왕인 선덕여왕 때 축조된 첨성대가 있다. 그런데 우주로 천문관측 위성을 보내는 지금에 있어 이 과거의 유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늘을 헤아려 하늘과 사람이 하나됨을 이루려 했던 우리들의 눈을 되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죽어버린 박물관의 유물 중 하나일 것이다. 아니 있는 것은 오직 참마음이고, 참마음 밖에는 또 다른 하늘이 없고, 참마음 안에도 또 다른 하늘이 없으니 내 하늘이 곧 우주의 하늘이고, 우주의 하늘이 곧 내 하늘이라는 그 눈을 다시 뜨지 못한다면 그것은 수학여행의 좋은 배경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안팎이 없고 주체와 객체가 없는 이런 관점으로 하늘을 살폈던 동양의 천문학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무엇이 중심에 놓였을까? 먼저 간단하게 동양의 천문관을 본 뒤, 그 눈을 가지고 신라의 첨성대를 살펴보자.

원래는 28수(宿)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동양의 천문이다. 하지만 조금 깊이 있게 시작한다면 태미원(太微垣), 자미원(紫微垣), 천시원(天市垣)을 중심으로, 즉 하늘의 3원을 중심으로 해서 천문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 다음에 하늘에 있는 오성을 중심으로 해서 위치를 잡고 28수의 궤도인 백도, 황도를 그린 뒤에 28수를 본다. 그리고 28수의 백도 밖, 백도 안, 그 다음에 밖의 밖, 안의 안, 이렇게 28수를 대개 5단계로 보게 된다.

이렇게 삼원, 28수와 일월(日月) 그리고 오성을 보고 나면 다음에는 움직이는 떠돌이 별인 요성을 본다. 이렇게 되면 하늘의 별들은 기본적으로 본 것이다. 물론 하늘은 조금 변형되어 인체에 적용된다.

그렇다면 우선 하늘을 살폈던 천문대로서 첨성대는 어떻게 그 기능을 했을까? 구조를 통해 살펴보자.

 

천문대로서의 첨성대

첨성대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사각형의 받침대 위에 장방형의 돌을 원기둥 모양으로 27단 쌓아 올렸고, 맨 위에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네모난 네 개의 긴 돌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밑에서부터 제12단과 제16단 사이에, 즉 13단과 14단 및 15단에 걸쳐 정남쪽으로 네모난 문이 뚫려 있다. 천문 관측을 위해서는 너무나도 불편해 보이는 필요조차 없어 보이는 이것을 감실이라고 한다. 크기는 가로와 세로가 각기 1미터쯤이다. 문의 아래와 위로 각각 12단의 돌이 쌓여있는데, 위와 아래는 단수로는 같지만 돌의 크기가 달라서 실제 높이는 아래와 위가 서로 다르다.

아무튼 첨성대에 들어가 감실의 위치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북극 5성, 즉 자미원(紫薇垣)의 북극 5성이다. 그러므로 북두칠성을 잘 관측할 수 있는 첨성대는 북쪽 부분이 산에 가리지 않고 보이는 지금의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다음으로 감실에서 다섯 단을 더 올라가면 이른바 ?빛도?, 즉 북극칠성의 궤도를 볼 수 있다. 여섯째 단과 일곱째 단의 사이에서는 백도(白道)-천구상의 달의 궤도- 그 위로 한층 더 올라가서 일곱째 단과 여덟째 단 사이로 가게 되면은 황도(黃道)-천구상의 해의 궤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인 일곱째 단에서는 황도와 백도가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만나는 지점에서 각각 28수가 돌아간다. 즉 감실에서 다섯 단을 올라가면은 28수의 궤도를 볼 수 있다. 그런데 28수는 5층으로 되어 있다. 위로는 세 층이 있고, 아래로는 두 층이 있다. 그래서 각각의 층별로 28수를 보면 28수가 대응된다.

엄밀하게는 보는 높이에 따라서 황도와 백도를 운행하는 28수의 궤도를 볼 수 있고, 그보다 조금 더 들어가면 하늘이 적게 보이므로 북두칠성의 궤도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위에서 2번째 단을 빼고 5째 단에 이르러서 보게 되면은 거기에서 28수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밑에 다시 두 단을 내려오게 되면 황도와 백도의 안쪽인 빛도(빛의 길), 즉 북두칠성의 궤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제일 위에 있는 샘터 모양으로 되어있는 이 사방은 황도와 백도가 만나는 28수의 경계지점이 된다.

여기서 두 단을 더 올라가서 일곱 번째 단인 마지막까지 올라가게 되면 무엇이 있을까? 그곳에서 관찰할 수 있는 범위는 북극성뿐만 아니라 남극성까지 등장하는 범위다.

 

제단으로서의 첨성대

다시 한번 중앙의 네모난 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하필이면 가운데에 필요도 없어 보이고, 드나들기에도 불편한 네모난 문이 있을까?

그런데 이 문의 높이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북극 5성이라고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기 때문에 첨성대는 굉장히 합리적인 천문대이자 제단의 역할을 같이 한 것이다.

과거의 유적들을 보아도 첨성대와 같이 한가운데에 문이 있는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것을 한자로 감실(龕室)이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말과 음가가 같으며 일종의 신이 머무는 방이다. 다시 말해 감실은 어떤 신위(神位)을 모시거나, 신에 해당되는 어떤 상징물을 모시거나, 상징물이 아닌 신 자체를 모시는 곳이다.

예를 들어 사람의 위패를 모시는 경우도 있고, 사람이 신이라면 사람의 몸을 모시는 경우도 있고, 그것이 혼이라고 생각해서 모시는 경우도 있는데, 감실은 그 자체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그것은 신의 방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틀을 중국에서는 영대(靈臺)라고 불렀다. 영대는 천문대의 역할과 제단의 역할을 같이 했다. 그러나 그중에서 보다 중요한 역할은 천문대의 역할이 아니라 제단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첨성대라면 경주 첨성대만 연상하지만 고구려와 백제에도 첨성대는 있었다.

고구려 첨성대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평양성 안에 아홉 개의 사당과 아홉 개의 못이 있는데 아홉 개의 사당은 바로 아홉 종류의 별이 날아 들어간 곳이며 이 못 옆에 첨성대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백제의 경우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천문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제단의 역할을 겸했음을 볼 수 있는 증거는 굉장히 많다. 그러므로 첨성대가 감실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이 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근본적으로 여기에 모시고자 했던, 이 감실 속에 모셔진 존재는 무엇일까?

신라에서는 세 곳에 대해서 큰 제사를 지냈었다. 신라의 시조신을 제사지냈고, 동시에 영성(零星)에 제사를 지냈다. 《삼국유사》를 보면, 당시 신라에서는 첨성대의 자리에 영성단이 있었는데, 신라 사람들은 입추 후의 첫 번째 진일(辰日)을 맞이했을 때 영성단에 제물을 차려놓고 하늘에 있는 영성(零星)에 감사하는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을 통해 정확하게 밑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고 했다. 자미원의 영역에 있는 북극 5성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기본적으로 모시고자 하는 것은 북극 5성 가운데서 우리가 중심으로 치는 ?바탕별?(바투하라), 다시 말하면 ?북신?(北辰)이며 극성(極星)이다. 이것이 북극 5성 가운데 으뜸별인 황제성, 즉 영성이다.

그렇다면 과연 영성(零星)은 무엇인가? 영(零)자는 ?비 우?(雨) 밑에 ?명령할 령?(令)자를 쓴다. 즉 모든 별을 명령하고 있는 별, 모든 별을 주관하고 있는 주재자별이라는 뜻이다. 태자성이 아니라 황제성을 가리키는 말이 영성이다. 즉 제단의 역할로서 감실의 기능에 모셔졌던 것은 바로 영성이라는 것, 그러므로 첨성대는 그 북극성을 하나의 신으로 해서 모시는 감실이기도 했던 것이다.

 

태양의 쉼터

마지막으로 맨 위에 있는 것을 우물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선 우물과 샘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물은 그냥 자연적으로 흘러서 속에 있는 물이다. 그리고 우물을 꾸미고 있는 제반 장치와 우물에 관련된 모든 시설들은 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첨성대도 또한 샘의 영역에 속할텐데, 이것은 나름대로 정북을 향하고 있다.

제단의 역할로 감실이 있다면 그 감실 앞으로 그대로 들어가면 걸리는 곳이 당연히 금성이 돼야만 한다. 정북 정남을 가리키고 있는 곳에서 일정한 거리를 가게 되어 반드시 금성의 출입구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금성 속에 있던 ?대정-하라정-하라샘터?와 일치했을 것이다.

 

부도의 이념 대신 불교를 지배의 이념으로 받아들인 시절에 만들어진 첨성대는 그 축조과정에서 어쩌면 불교의 33천 개념이 동원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드는 기법, 여기서 모셨던 대상은 여전히 불교 이전의 신라 문화와 지향을 반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과거의 유산을 다시 살펴보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그 뜻을 찾아 하나의 모델로 삼아 밝은터를 다시 세우기 위함이다. 즉 복본의 모델을 삼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과 함께 하늘과 땅은 삼재로서 모든 존재가 평등할 수 있다는 것, 인체의 구성과 운행 원리가 하늘과 땅과 서로 다르지 않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라인이 우주를 살피던 눈을 되찾아 잃어버린 우리의 마음여행길을 다시 가고자 할 뿐이며 그것을 나침반으로 삼아 우리속의 자미원을 찾는 여행을 떠날 뿐이다. 내 하늘이 우주의 하늘이고 우주의 하늘이 곧 나의 하늘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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