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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세종 때 왕비의 장례 의식에 대한 내용

by 자연처럼 2019. 6. 13.

세종 때 왕비의 장례 의식에 대한 내용



세종실록 111권, 세종 28년 3월 27일 갑오 1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대렴하다. 전·빈소를 설치하고, 기일 전에 찬궁을 짓게 하다

  

       

대렴(大斂)하였다.

내시가 대렴상을 서계의 서쪽에 두고, 지의(地衣)와 욕석(褥席)을 상위에 진열하고는, 먼저 염매의 횡포 다섯 개를 아래에 펴되, 백세저포 두폭을 찢어 여섯 개로 만들어 그 다섯 개만 쓰고, 다음은 염매의 종포(縱布) 세 개를 위에 펴되, 백세저포 한 폭을 찢어 세 개를 만들어 쓰고, 다음은 포금(布衾), 그 다음은 포의(布衣)인데, 혹은 뒤집어 놓기도 하고, 혹은 거꾸로 놓기도 하되, 다만 방정(方正)만을 취하고, 오직 명복(命服)만은 거꾸로 놓지 않으며, 합계 90칭(稱)이다.


이를 들고 서계로 올라가매, 나인이 받아 들어 시체의 남쪽에 둔다. 이에 조석전(朝夕奠)을 옮기고, 나인이손을 씻고 함께 시체를 들어 대렴상으로 옮기고는 금(衾)을 거두어 먼저 발[足]을 가리우고, 다음은 머리를 가리우고, 다음은 왼쪽을 가리우고, 다음은 오른쪽을 가리우되, 그 방정함을 취한다. 염매를 잡아매되 먼저 끝[殺]으로써 발을 감추고 올라가며, 뒤에 덮개[冒]로써 머리[首]를 감싸고 내려와서, 마침내 일곱개의 띠[帶]를 잡아맨다.


기일 전에 아주 부드러운 재를 관(棺) 안의 밑에 4촌 가량 펴고, 칠성판(七星板)을 그 위에 놓고, 두꺼운 종이로써 칠성판의 구멍을 발라서 막고, 욕석을 칠성판 위에 설치하고, 이에 관을 들고 들어와서 전중(殿中)의 조금 서쪽에 두고, 염하고 남은 의상(衣裳)은 적당히 관의 밑바닥에 펴고, 나인이 함께 시체를 들어 관에 들여넣으며, 또 의상을 시체 위에 펴되, 편편하게 꽉 차게 하고, 생존할 때의 빠진 치아(齒牙)·모발(毛髮)과 깎은 손톱·발톱을 소대(小帒)에 담아서 재궁 안의 네 모퉁이에 채운다.


왕세자가 기대어 통곡하기를 슬피 하고, 대군 이하와 공주 이하가 통곡하기를 슬피 한다. 왕세자와 대군 이하가 자리[次]로 물러가고, 공주 이하도 모두 자리로 물러간다. 내시가 장인(匠人)을 불러 뚜껑을 덮고 옻칠을 하고서 나비은살대[衽] 세 개를 끼운다. 나비은살대는 나무로써 만들었는데, 그 모양은 양쪽 머리가 넓다. 먼저 관 가의 양쪽머리과 중앙의 합치는 곳[合處]을 뚫어서 움푹 패인 모양[坎刑]을 만들고는 나비는 살대로써 이를 연결시켜, 밑과 뚜껑이 서로 합친 곳을 튼튼하게 하고, 서로 합친 외면(外面)에 옻칠로써 이를 바르고, 또 흰 생초(生綃)로써 가로세로[縱橫] 이를 묶고는 관의(棺衣)로써 덮는다.


이에 전(奠)을 설치하고, 드디어 시어소(時御所)의 서청(西廳)에 빈소(殯所)를 설치한다. 기일 전에 찬궁(欑宮)을 정전(正殿)안에 지어, 북쪽에 의거하고 남쪽을 향하게 하는데, 【수양 대군(首陽大君) 집의 서청(西廳)인데, 청(廳)의 앞과 뒤로써 동서 남북으로 삼다. 】 재궁 평상(梓宮平牀)의 길이와 넓이를 미리 헤아려 사면에 각각 1척(尺) 5촌(寸)을 더 넓도록 하고, 먼저 벽돌로써 땅에 펴고 석회(石灰)로써 그 틈을 발라서 찬궁의 기지(基址)를 만들고, 다음에 땅에 네모진 나무를 설치하고, 네 개의 기둥을 그 위에 세우고는, 들보를 걸치고 서까래를 걸어 벽을 만들어 집 모양과 같이 하되, 다만 그 동쪽 벽만을 비워서 대자리[竹簟]로써 그 안의 삼면(三面)과 위에 붙이고, 편죽(片竹)을 사용하여 가로세로 못[釘]을 끼우되, 못의 튼튼한 것으로써 한도로 삼고, 또 두꺼운 종이로써 이를 바르되, 종이로써 주작(朱雀)·현무(玄武)·청룡(靑龍)·백호(白虎)를 그려서 방위에 따라 이를 붙이고, 그 외의 삼면과 상면(上面)에는 먼저 진흙으로써 바르고, 다음은 정포(正布)를 바르고, 그 다음은 두꺼운 종이를 바르며, 유둔(油芚)과 지의를 안에 펴고 발 없는 평상[無足平牀]을 설치하고 대자리[竹簟]와 욕석을 그 위에 펴 놓는다.


시각이 되자, 내시(內侍)가 재궁(梓宮)을 받들어 평상위에 안치(安置)하되,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 관의(棺衣)로써 덮은 뒤에 유둔(油芚)으로 거듭 싸고, 흰 정포를 사용하여 가로세로 이를 묶는다. 【내시 1인은 향탁(香卓)을 받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다음 2인은 혼백(魂帛)·유의함(遺衣函)과 교의(交椅)를 받들고, 다음 1인은 명정(銘旌)을 받들고, 다음 2인은 책보(冊寶)를 받들고, 내시가 함께 재궁을 들고 그제야 간다. 왕세자와 대군 이하가 이를 따라 빈전에 나아갔다가 왕세자와 대군 이하가 자리[次]로 물러나온다. 】 미리 동벽기(東壁機)를 만들어 이를 막아 못을 치되, 튼튼하게 하고, 진흙으로 안팎을 바르고 도배(塗排)하기를 위와 같이 한다.


백초 만정(白綃滿頂)과 백초 장막[白綃帳]을 설치하고, 【그것을 깊숙이 하기 위한 때문이었다. 】 다시 영상(靈牀)을 찬궁의 동남쪽에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만정(滿頂)을 설치하여 평상·욕석·병풍·베개·의복·이불의 등속을 그 안에 두되, 남쪽으로 머리를 두게 하고, 조석(朝夕)으로 낯을 씻고 머리를 빗는 도구를 설치하되, 모두 평상시와 같게 한다. 】 영좌(靈座)를 찬궁의 서남쪽에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평상·욕석과 병풍을 설치하고, 교의를 욕석 위에 두고, 혼백과 유의함을 교의위에 안치하였다. 】 명정을 받들어 영좌의 오른편에 세우고, 책보안(冊寶案)을 영좌의 동남쪽에 두고, 덮개[蓋]와 문짝[扇] 각각 두 개를 영좌 앞 좌우에 설치하고, 【덮개와 문짝은 모두 백저포(白苧布)를 사용하고, 덮개의 제도는 한 처마[簷]이다. 】 이에 전을 차려 놓는다. 【유사(攸司)가 찬(饌)을 갖추어 올리면, 상식(尙食)이 그 소속을 거느리고 이를 전해 받들어 영좌 앞에 드린다. 향로·향합과 초[燭]를 설치하고, 또 준(尊)을 지게문 밖[戶外]의 왼쪽에 설치하고, 술잔 3개를 준소(尊所)에 둔다. 왕세자가 들어와서 빈전(殯殿) 지게문 밖의 동쪽에 나아가서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여 슬픔을 다하고, 대군 이하는 그 뒤에 겹줄로 하여 서쪽을 향하되, 남쪽을 위로 하여 부복하고, 공주 이하는 지게문 밖의 서쪽에 나아가서 겹줄로 하여 동쪽을 향하고 자리에 올라가서 모두 통곡하여 슬픔을 다한다.


상식이 향안(香案) 앞에 나아가서 상향(上香)하고, 또 술 석 잔을 따라 연달아 안(案)에 드린다. 지게문 밖에는 상시 장막을 설치하여 꼬불꼬불하게 해서 서쪽과 동쪽을 가로 막았다. 】 나인(內人)이 빈소(殯所)를 모시기를 평상시의 예절과 같이 한다. 왕세자가 상차(喪次)로 돌아오고, 대군 이하와 공주 이하가 각기 상차로 돌아온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111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4책 660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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