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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윤집궐중(조선왕조실록 외)

by 자연처럼 2019. 6. 28.

인종실록 2권, 인종 1년 4월 2일 갑오 1번째기사 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주강에 나아가서 《송감》을 강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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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가 아뢰기를,

"후세의 제왕의 학문은 경연(經筵)에 달려 있으니 대개 제왕의 학문은 장구(章句)나 문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이 나아가서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귀하게 여길 따름입니다.

 요(堯)·순(舜)·우(禹) 세 성인이 천하를 서로 전할 때에 ‘인심(人心)은 위태하고 도심(道心)은 희미하니, 정밀하고 전일하여야 참으로 그 중도(中道)를 지킬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 16자로도 천하의 지극한 이치를 모두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대개 인심이란 형기(形氣)의 사사로운 것에서 나온 것이어서 날카로운 창끝이나 사나운 말과 같이 억제하기 어려우므로 위태하다 하고, 도심이란 의리의 공변된 것에서 나온 것이어서 샘이 비로소 흐르고 불이 비로소 타는 것과 같으므로 희미하다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정밀하게 살피고 전일하게 지켜서 굳게 간직하고 함양되게 해야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얻는 것이 있고 움직이는 가운데에서도 잃는 것이 없을 것이며, 능히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공부를 극진히 하여 그 인심이 나올 때는 마치 적이 앞에 있듯이 반드시 이기고야 마는 것처럼 한다면 도심이 나올 때는 청명(淸明)한 기가 곳에 따라서 사(私)를 이기는 것이 마치 장수가 앉아서 군졸을 통솔하는 것과 같아 동정(動靜)·언행(言行)과 수작의 갖가지로 변하는 것이 모두 바른 데로 돌아갈 것입니다.


" 曰: "後世帝王之學問, 在於經筵, 蓋帝王學問, 不在於章句文字之間, 貴乎深造而自得之而已。

三聖人, 以天下相傳, 不過曰: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以十有六字, 而天下至理, 無不俱載


蓋人心出於形氣之私, 如銛鋒悍馬而難制, 故曰危; 道心發於義理之公, 如泉始達火始然, 故曰微。 必精以察之, 一以守之, 使之操存涵養, 靜有所得, 動無所失。 而充盡謹獨之功, 當其人心之出, 如敵人當前, 必欲勝而後已, 則道心之發也, 淸明之氣, 隨處而克私者, 譬如將帥, 坐御軍卒, 動靜云爲, 酬酢萬變, 盡歸於正。


이하생략




명종실록 5권, 명종 2년 2월 7일 기축 3번째기사 1547년 명 가정(嘉靖) 26년                                             

홍문관 부제학 주세붕이 《대학》과 《중용》에 대해 설명하며 올린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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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말하기를 ‘위에서 인을 좋아하는데 아래에서 의를 좋아하지 않을 자가 없다.[未有上好仁而下不好義者也]’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임금으로 하여금 반드시 인에 그치게 하기를 활쏘기에 있어서의 표적과 같이 하고 나그네의 목적지와 같이 하여 오직 정하게 오직 한결같게[惟精惟一] 하며, 사욕(私欲)을 누르고 천성(天性)을 회복하여 조금도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 없으면, 그 마음이 대낮의 푸른 하늘처럼 구름도 사라지고 안개도 걷혀 티 하나 없이 맑아질 것입니다.


대개 이기(二氣)가 조화되어 만물을 생육하는 것이니 결코 한 가지 물(物)도 제자리를 얻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큰 천하도 손바닥 위에서 운용할 수 있거늘 하물며 한 나라쯤이겠습니까. 만약 한 물(物)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인(仁)의 도가 부족하여 한 물에 혜택이 미치지 못하게 되는 셈이니 천지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되는 것입니다. 아, 제왕이 된 자 어찌 수고롭지 않겠습니까



又曰: "未有上好仁而下不好義者也。

" 誠使人君, 必止於仁, 如射者之的, 行者之歸, 惟精惟一, 克之復之, 無一毫人欲之私, 則其爲心, 如白日靑天, 雲消霧歛, 無一査點綴


蓋將參二氣而妙萬物, 亦必無一物之不得其所矣。 天下之大, 可運於掌, 況於一國乎? 如有一物不得其所, 則仁之道歉, 而爲餒於一物, 爲愧於天地矣。 嗚呼! 爲帝王者, 不亦勞乎?



이하생략




        

효종실록 19권, 효종 8년 11월 2일 경자 4번째기사 1657년 청 순치(順治) 14년

장령 조극선이 상소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할 것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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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전일하게 해야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이 16자는 《심경(心經)》 첫머리에서 선유들이 자세하게 의논해 놓았습니다. 그 공부의 선후의 차례는 격물(格物)·치지(致知)로부터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것이니, 한 부(部)의 대학(大學)중용(中庸)의 문정(問政) 한 장(章)에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전하의 고명하신 학문으로 어찌 자세히 궁구하여 힘껏 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대체로 인심과 도심은 모두 마음입니다. 일단 형체와 기질을 부여받았으니 성인이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어, 사적으로 하기는 쉽고 공적으로 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위태롭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성명(性命)의 바름을 받았으니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도심이 없을 수 없지만, 밝히기는 어렵고 어두워지기는 쉽기 때문에 미미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이 발하지 않고 중(中)의 상태에 있는 것을 성(性)이라고 합니다. 이 성은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 다섯 가지입니다. 마음이 발하기 전에 공부를 하여 함양하는 방법은 오직 남이 보지 않는 데서도 삼가하며 남이 듣지 않는 데서도 조심하는 것뿐입니다. 마음이 이미 발한 것은 정(情)이라고 합니다. 이 정은 희(喜)·노(怒)·애(哀)·락(樂)·애(愛)·오(惡)·욕(欲) 일곱 가지입니다. 이 일곱 가지는 감응에 따라 움직이는데 귀·눈·입·코 등이 형체와 기질의 사사로운 데에 감동되는 것이 많고, 인·의·예·지 등이 성명(性命)의 바른 것에 감동되는 것은 적습니다. 그러므로 성인만이 정을 발하여도 반드시 절도에 들어맞지만, 일반인들은 절도에 들어맞는 것이 항상 적고 절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 항상 많습니다.


其要又在於相授受之心法也。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十六字, 於《心經》篇首, 先儒論之詳矣。 其工夫之次第先後, 自格物致知, 至於治國平天下, 則一部大學, 與中庸問政一章備矣。 以殿下聖學之高明, 豈不詳究, 而力行之哉?


蓋人心道心, 同一心也。 旣有形氣之稟, 則雖上智, 不能無人心, 而以其易私而難公, 故曰危。 旣受性命之正, 則雖下愚, 不能無道心, 而以其難明而易昧, 故曰微。


心之未發而在中也, 謂之性。 性者, 仁義禮智信五者也。 未發之前, 所以用工而涵養者, 惟在戒愼不覩恐懼不聞而已。 心之已發, 謂之情。 情者, 喜怒哀樂愛惡欲七者也。 七者隨感而動, 而感於耳目口鼻形氣之私者多, 感於仁義禮智性命之正者少。故唯聖人之情, 發必中節, 衆人則中節者常少, 而不中節者常多。


따라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 정이 발하려 할 때에 바로 성찰하여 정밀하고 전일하게 해서 방탕하여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을 절제해 단속하여 절도에 맞는 데로 돌리면, 이른바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자도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사무에 응접하지 않고 오로지 마음을 잡고 보존하는 데 힘을 써 그것이 순일하고 무르익기를 기다리지 못합니다. 하물며 인군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니, 하루에도 모든 정치를 하는 가운데 일곱 가지 정이 번갈아 감응이 되어 상호 발하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學者於將發之際, 便加省察, 而精之一之, 使其蕩而不中節者, 制而約之, 歸於中節, 則所謂人心聽命於道心者是也。 然而學者, 猶不能閉口合眼, 不應事務, 而專用力於操存, 以待其純熟也。 又況人君代天理物, 一日萬幾之中, 七情交感而互發




        

정조실록 54권, 정조 24년 5월 22일 계묘 3번째기사 1800년 청 가경(嘉慶) 5년

장령 권한위가 천주교의 금압, 인사 적체의 해소, 환곡의 폐단 등을 상소하다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세하니 오직 정밀하고 전일해야만 그 중도를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16자는 곧 요(堯)·순(舜)·우(禹) 등 성군이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이자 또한 우리 열성조에 서로 주고받은 아름다운 이상이기도 하니, 전하께서는 항상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일깨우고 가르치는 방도로 삼으소서. 오늘날 조정 신하들이 믿고 전하를 섬기는 것은 ‘의리를 밝힌다[明義理]’는 세 글자에 불과하고 나라의 힘이 만세를 유지하는 것도 이 세 글자에 벗어나지 않는데, 근년 이후 어떤 일이 의리에 관계되면 금령이 엄중하고 어떤 말이 충직한 뜻에서 나오면 훈계하시는 말씀이 예사롭지 않으니, 아랫사람들이 평소에 전하께 기대했던 바가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생각하고 또 생각하시어 전반적으로 의리에 관계되는 일은 아무쪼록 더욱 천명하소서.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十六字, 卽相傳之心法, 亦我列聖朝授受之嘉謨也, 伏願殿下, 常自警惕, 以爲早敎諭之方焉。 今日廷臣之藉手而事殿下者, 不過明義理三字, 國勢之所以維持萬世者, 亦不出此三字, 近年以來事涉隄防, 則禁條莫嚴, 言出忠讜, 則辭敎非常, 甚非群下平日所期望於殿下者。 伏乞更加三思, 凡係義理之事, 務益闡明



곤도(袞道) 

 

온갖 인연이 있는 자라야 얻으리라.

 

 나라에 큰 도가 있으니 왈 "곤도(袞道)"라 하느니라.  능히 천지일월성신과 더불어 그 도를 함께 하는지라 고로 "곤(袞)"이란 천지조화의 체요. 만물이 귀장하는 근본이며 "도(道)"라는 것은 대체(大體)로 말하면 하나 이나 세소(細小)히 말하면 무릇 일십이만구천육백 갈래이니 이 길목마다 각각 왕래행보하는 길과 출입향배하는 문과 개폐동정하는 장소가 있느니라.


  이 천하에 인생의 도가 "윤집궐중(允執厥中)"의 도 만한 것이 없나니 첫째가 곤의 취지이며, 둘째가 곤의 처세며, 셋째가 곤의 지시함이라 이 세가지는 방과 법과 설이며 넷째가 곤의 앎이요 다섯째가 곤의 의지며 여섯째가 곤의 경지에 이름이니 이 세 가지는 인과 수와 행이며 일곱째가 곤의 지혜라 이에 "윤집기중(允執其中)"의 도가 완전해 짐이라.


  옛날 옛적에 제왕이신 요 임금이 가라사대 너 순은 하늘의 책력수가 네 몸에 갖추어져 있으니 "윤집기중" 하라 하시고 제왕이신 순 역시 우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하늘의 책력수가 너의 몸에 갖추어져 있으나 인심은 너무나 위태롭고 도심은 너무나 미미하니 온갖 정신을 오로지 하나로 하여 "윤집궐중"하라 하시니 이 역시 "곤도"를 이름이니라.


  그 되어 있는 것이 상하 왈 양단이요 전후 왈 사문이요 좌우 왈 육도니 이 곳에서 "윤집궐중"하면 곧 칠이 되니 왈 "곤지"니라. 춘하추동 왈 십방이요 이 방위 마다에는 또 십이 문도가 있고 이곳에 각각 우물정 자와 밭전 자의 방편이 있는지라 그러므로 극히 명철하면 곧 아홉이요 미혹하면 곧 칠십하고 둘이며 번거롭고 어지러우면 곧 백하고 팔이니 이 세 가지는 모두 방편에 말매웁지 아니함이 없는이라.


  이 방편마다 어쩔수 없이 또 우물정 자와 밭전 자의 방편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방편의 길 마다에는 어느 것인들 귀하지 아니하랴, 중하지 아니하랴, 사랑하옵지 아니하랴, 집착하지 아니하랴. 이와 같이 보배롭고 귀중하지 아니한 것이 없을 것이나, 그러나 이것에 결박되는 처지에 이루지는 말아야 하느니라.


  이 네 가지에 만약에 그 몸과 마음이 결박 될 것 같으면 즉시 "천잠삭"(그 무엇으로도 끊어 낼 수 없는 바줄)으로 변화하리라. 오호라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 얽매임에 이른자가 온 천하에 가득하도다. 만약에 이 같은 처지에 이른자는 하늘과 땅의 덕화로서도 능히 구원치 못 할 것이고 해와 달과 별의 세가지 광명으로도 능히 밝힐 수 없을 것이거늘 하물며 성현의 밝은 이치로서야 어찌 가르칠수 있으리오.


  건곤은 확 트인 덕화로서 삼백육십 도수를 베풀고, 일월은 음양의 조화로서 삼백육십 방도를 타나니 이와 같이 이루어진 명도가 무릇 일십이만구천육백수에 이르는지라 하나 하나 모두가 다 무애무량한 공덕의 문호며 도로인 지라 그런 까닭에 만물은 이에 인연하여 들고 나지 아니함이 없으며 만법은 이를 연유하여 가고오지 아니함이 없느니라.


  이를 이른바 "윤집궐중"의 방편이며 문호이며 도로 아님이 없다 하나니라. 이에 "선지자"가 밝히시여 설명하셨고 우리에게 있어서는 몸을 닦고 그리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우리네 인생이 기거좌와하고 문호를 출입하며 길을 왕래함에 있어서 이 방편이 어느 곳인들 있지 아니하리요. 어느 때 어느 곳에나 항상 반 걸음 반 손짓 사이에 있는 것이요. 별도에 어느 한 문파가 없는지라 그래서 말 하기를 "대도무문"이라 하느니라.


  너는 어이 밖으로 기이한 문파를 찾아서 과거 현재 미래 등 삼생을 그릇 치려 하느냐 방편이란 것은 역시 방편일 뿐이니 혹 너는 방편으로서 하늘을 삼을 것이냐 또는 신명을 내던질 것이냐 혹은 미혹되어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할 것이냐 너의 자리 한곳에 항상 있는 방편을 잡고 타고 건너고 버리고 한 길로 "윤집궐중"의 도장으로 나가서 "물과 불로써" 일거리를 삼아서 유유자적하고 소요하며 점점 닦을 것 같으면 스스로 원명한 결과를 얻게 되리니라. 만약에 망령되어 외부에서 도를 구하려 할 것 같으면 곧 그 원망과 원통함이 반드시 이루어 지리라.


  온 정신을 오로지 하나로 하야 "곤도"에 홀로 걸어가야 하느니라.

 

                                                                                                                                                                      선생님의 글

다산의 '윤집궐중'론

http://dlps.nanet.go.kr/SearchDetailView.do?cn=KINX2007136332&sysid=n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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