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림의 또 다른 이름, ‘머후리’
오늘날의 천문학에는 많은 도구들이 있다. 이런저런 망원경들이 있고, 거리와 빛의 강도를 측정하는 도구들도 많이 있다. 지리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지질을 분석하는 도구로부터 지층을 탐사하는 도구 등 너무나 많은 도구들이 있다.
그러면 옛 분들의 천문지리에서는 어떤 도구가 쓰였을까? 나름대로 중요한 도구들이 있었다. 천문대 격이라 할 수 있는 첨성대도 있었고, 땅의 좌향을 재는 도구들도 있었으며, 수맥을 알아내는 도구들도 있었다.
허나 가장 중요한 도구는 사람 자신의 몸이었다. 요컨대 우리 문화에서 천문지리는 바로 사람의 감각을 기준으로 하는 천문지리였던 것이다. 도구를 이용하더라도 사람의 감각을 보완하는 정도이지, 모든 것은 사람의 몸을 기준으로 측정되었다. 우리의 천문은 허블망원경으로 보는 섬세한 천문이 아니라 우리의 몸으로 보는 ‘주관적’ 천문인 것이다.
따라서 하늘과 땅의 관찰자인 사람은 먼저 관찰의 바탕이 되는 도구인 자신의 몸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렇게 몸을 가다듬어야만 올바른 관찰이 되고, 올바른 관찰을 통해서만 올바른 삶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몸을 가다듬을 것인가? 먼저 스스로를 하늘과 땅의 일부분으로 감각할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야 했다. 산과 들을 다니고 물을 바라보고 바람을 느끼고 비를 맞으며, 달을 느끼고 별을 헤아리는 것이 몸에 익어야 했다. 그런 다음에야 체계적으로 천문과 지리를 배웠다. 즉 논리적 이성으로 배우기에 앞서 몸으로 배워나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천문지리를 배우는 우리 고유의 방법이며, 그것이 천문지리를 배우는 어울림의 예이기도 했다. 그것을 일러 ‘머후리’라고 불렀다. 머후리는 물 흐름을 가리키는 ‘머’와 바람을 가리키는 ‘후리’가 붙은 말로서, 한자어로는 ‘풍류’(風流)라고도 했다. 옛 신라 화랑들의 공부였던 풍류가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풍류란 산천으로 유람이나 다니는 것이라고 보는 오해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지난날 자신의 놀음을 풍류라고 우겨대던 겉멋 든 사람들이 그 말을 함부로 씀으로써 오해를 불러일으킨 측면도 없지는 않다.
지난 호부터 천문지리를 좀 체계적으로 밝히자니, 이처럼 그 관찰자의 문제를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천문지리는 관찰자로부터 비롯해서 관찰자로 되돌아오는 하나의 예, 즉 어울림의 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으로만 우리의 천문지리를 배우려는 분들은 자신을 다시 돌이키는 일부터 해야 한다. 어렵다면 나름대로 병행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천문지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울도뷔나 바나리의 답사도 그런 까닭에서 이루어지는 ‘머후리’의 하나라고 해야겠다.
한 가지만 더 붙이자. ‘머후리’를 나서는 이는 자유로움을 빼고는 어떠한 선입견과 목적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다만 하늘과 땅과 벗들에게 이끌려 갈 따름이다. 그것이 흐름이며, 땅위에서 그 흐름은 늘 물과 함께 한다. 마치 우리들의 혈구들이 아무런 더러움 없이 깨끗할 때에만 핏줄을 따라 잘 흐르는 것처럼.
기수화토(氣水火土)
천문지리의 관찰자는 ‘머후리’를 하되, 모든 것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하늘이나 땅과의 어울림은 자신의 것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며, 그래야만 자기 속에 들어있는 하늘과 땅의 힘이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머후리’의 시작이며, 그 머후리를 통해 생명체의 내적 특성이 뚜렷하게 펼침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김’과 ‘풀’이니, 한자로는 기(氣)다.
다음으로 머후리를 하는 이는 늘 흐름을 따라야 한다. 미리 줄을 긋고 가는 것은 머후리가 아니다. 그냥 나서는 것이다. 물을 따라 오르고 내린다. 그리하여 자연의 그 물 흐름이 몸 안에서도 재현된다. 그것이 머후리의 펼침이며, 그 머후리를 통해 생명체는 마침내 어울림의 단초를 얻는다. 이것이 바로 ‘멋’과 ‘뭇’이니, 한자로는 수(水)다.
셋째로 머후리를 하는 이는 늘 돌이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반응해야 한다. 물 흐름을 따라 어울리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서 그것과 맞서는 힘을 찾아야 한다. 내리면 올리고 올리면 내림으로써, 참된 어울림을 찾아야 한다. 어울림은 맞서서 이루는 새로운 하나됨이지, 마냥 따르는 딸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머후리의 키움이며. 그 머후리를 통해 생명체는 어울림의 참된 주체로 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부름’과 ‘불림’이니, 한자로는 화(火)다.
마지막으로 머후리를 하는 이는 자기의 내부와 외부에서 어울림의 힘을 펼쳐야 한다. 안과 밖은 비례하는 것, 안으로 펼친 만큼 밖으로 펼쳐지게 마련이지만, 그 방법은 서로 다르게 전해온다. 다만 좌방 머후리는 밖으로 펼쳐 안으로 흐르게 한다. 이 것이 머후리의 이룸이며, 마침내 관찰자는 하늘과 땅을 마주보고 올바른 눈으로 그것을 관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함 ’과 ‘일 ’이니, 한자로는 토(土)다.
이것이 우리들의 천문지리다. 우리들의 천문지리는 이성의 굴레에 갇힌 초라한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예요, 어울림의 완성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참된 ‘멋 ’이다.
박 현 (한국학연구소 소장)/ 겨레풍수중에서
최치원 [鸞郞碑序文]에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神史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말해서 풍류라한다. 그 실 삼교가 포함 된 것으로 (삼교는) 이안에 접목 되어 군생한 것이다. 집에 들어 오면 부모에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말씀과 같다. 또 무위로써 처신하고, 말없는 가르침으로 행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으뜸, 근본, 뿌리)이 된다. 일체의 악업을 짖지 말며,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합은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같다
삼일신고를 보면 위 글중 나오는 實內包含三敎 즉 유불선 삼교를 포함한 것이 현묘지도 즉 풍류 라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일체유심조'라는 불교 유심론을 얘기 한것이 心 依性 有善惡 이고
이기일원론을 강조하는 노장사상의 선도는 氣 依命 有淸濁 이요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는 身 依精 有厚薄 이라 볼수 있으니
예로부터 이 3가지를 어우르는 도가 있었다는 것이요.
3眞 3妄을 알고 止感, 調息 禁觸하여 性通功完 하는 것이 그것이라는 야그가 되는 것이네요.
감정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그치고(止感), 숨에서 일어나는 기운을 조절하고(調息), 감각에서 일어나는 의식을 끊어(禁觸), 3망의 뿌리인 心氣身을 3진인 性命精으로 돌려 하늘(神, 자연)과 하나 되는 성통공안(깨달음)에 이르라는 것.
이게 풍류도라면 맞을까요?
풍류 .......